꽃살문
윤상희
화사한 벚꽃길이 길손을 맞이한다. 풍기 나들목을 빠져나와 순흥면에서 벗어나고 있는 길이다. 산골길을 굽이돌아 소백산 국망봉 자락에 다다르자 차 한 대 지나가기 빠듯한 산길이 펼쳐진다. 굽잇길에 들어서자 아랫녘 매화가 향주머니 끈을 풀어놓은 듯 산속의 내음이 풍요롭다. 세속의 소리는 어느새 멀어지고 따스한 봄바람이 옷섶을 열어준다.
인적 드문 산비탈에 이르자 성혈사가 고즈넉이 나를 맞이한다. 절집은 법당 새 채에 스님이 계시는 요사와 수행승방 한 채가 전부이다. 암자라 해도 좋을 소담스런 절의 대웅전 뒤뜰로 부챗살처럼 가지를 펼친 만지송이 장관이다. 세 칸 법당에 달린 보물 832호 꽃살문 여섯 짝을 만나러 아침 먼 길을 달려온 나는 나한전으로 얼른 발걸음을 옮긴다.
조선 명종 8년(1553)에 처음 지어져 인조 12년(1634)에 재건된 나한전은 아담스러운 고향 집에 온 듯 내 마음을 열어준다. 이 건물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단층 맞배 기와집에 다포식 건물이다. 배흘림기둥에 가깝게 다듬으면서 벽선을 세우지 않고 문짝을 달았다. 법당 문중에서도 꽃살문은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잰걸음으로 달려온 나를 반겨주며 시공을 넘어 끝없는 연기의 세계로 가슴자락을 열게 한다.
문이란 무릇 세상과의 통로이며 또 다른 출발이나 전환을 의미할 테다. 마음을 가다듬고 먼 길을 달려오게 한 꽃살문 앞에 조용히 선다. 문짝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들릴 듯 말듯 천사의 노래인 양 속삭이는 문의 도란거림을 놓칠세라 온 신경의 촉을 깨워본다. 이곳의 꽃살문은 여느 문처럼 사방 연속 꽃무늬를 새긴 형상이 아니라, 한 짝에 넷씩 긴 목판에 여밭을 뚫새김하여 문살 위에 얹혀져 있다.
찬찬히 꽃살문 문양을 음미해본다. 문살마다 연꽃은 흐드러졌고 연 잎은 하염없이 소담스럽다. 송이마다(십종선법十種善法·연꽃의 열 가지 이로움)을 들려주고 있다. 드나들면서 연꽃 같은 삶을 살라는 뜻일 게다. 수줍게 얼굴을 내미는 꽃살문의 여린 송이 사이로 아득히 할머니가 웃고 있다.
어릴 때 나는 꽃 문살을 드나들며 자랐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문짝을 떼서 묵은 종이를 벗겨내고 새 창호지로 문을 발랐다. 온 식구들이 함께하는 집안의 겨울맞이 행사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문고리 주위에 책갈피에 눌러 말린 단풍잎이나 꽃잎으로 꽃 문살을 만들어주셨다. 문짝 가운데에는 손바닥만 한 유리판을 넣어 문을 열지 않고도 바깥을 볼 수 있었다. 가장자리가 매끈하지 못한 유리판도 할머니 손길이 닿으면 꽃병처럼 화사한 거울이 되곤 했다. 아마도 그 시절 시골집은 집집마다 비슷한 꽃 문살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우리 집 꽃 문살은 참한 모습과는 달리 아픈 사연도 담고 있었다. 6·25 동란 때 객지에 계시던 삼촌이 인민군의 총격으로 돌아가시었다. 전란 중에 시신이 집으로 오던 날의 할머니 모습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 할머니는 장례가 끝나는 날까지 문밖을 나오지 못하셨다. 꽃 문살 사이에 붙은 작은 유리로 내내 밖을 응시하고 계셨다. 그 후로부터 넋을 놓은 듯 꽃 문살만 바라보는 날이 하염없이 늘었다.
꽃 문살의 고운 단풍잎도 꽃잎도 할머니의 눈에는 더 이상 아름다움으로 비춰지지 않았을 테다. 돌아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저버릴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애절한 기다림이 또 다른 희망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꽃 문살을 통해 할머니는 삼촌을 만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중한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볼 수 있기에 할머니에게 꽃 문살은 또 다른 희망과도 같았을 테다. 아니, 기억과 갈망으로 흘린 눈물의 시간이 얼룩져 있었을 것이다.
나한전 꽃살문 문양을 다시 더듬어본다. 스쳐가는 바람에 파르라니 떨고 있는 문양들이 반백 년을 넘은 시간을 넘어 또 다른 이야기들을 속삭이고 있다. 성스러운 공간과 세속의 공간을 구분하는 꽃살문을 앞에 두고 나는 다시 시공을 초월하는 화엄의 세계로 빠져든다. 바람이 지워 버린 단청 사이로 음각으로 조각된 꽃살문의 세상은 서서히 양각의 돋을새김 극락정토를 펼쳐내고 있다. 멀리서 보면 대칭 같은 어간의 두 짝은 좀 더 가까이서 살피면 비대칭을 이루었다. 우측 창호는 솟을 모란꽃살문 위에 통판으로 모란무늬를 조각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희미하게 남은 단청에 누렇게 변한 나무의 속살이 고색창연함을 더해준다. 세월의 흔적에도 목판 위에 핀 꽃은 고졸한 맛을 잃지 않고 있다.
꽃살문의 대칭을 도드라지게 깨는 것은 오른쪽 문에 새겨진 동자상이다. 귀엽게 상투를 튼 동자가 연잎 위에 사뿐히 올라서 있다. 손에 연꽃 봉오리를 잡고는 연잎 배를 타고 꽃 삿대를 저어간다. 모든 번민을 던져버린 동자승의 천진난만함이 봄바람같이 가볍다.
문득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떠오른다. 저렇듯 화사한 꿈을 꾸며 무언가를 전하고 싶은 얼굴이다. 표정으로 봐서 나에게 뭔가 말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아직 그 뜻을 읽어 낼 재간이 없다. 내게 설법 같은 것을 할 의도는 없는 것 같고, 잎 배를 따라가다 보면 모든 갈등으로부터 놓여날 청정한 세계로 인도해 줄 것만 같다. 무아의 깊이 속에서 피어오른 동자승의 맑은 표정이 오욕으로 때 묻은 나에게 무구한 미소로 깨우침을 주는 듯하다.
동자상의 미소에 넋을 잃은 시간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스쳐간다. 꽃살문이 만든 문양을 바라보며 문득 내 삶이 만들어 낸 무늬는 어떤 모양일까 궁금해진다. 할머니의 꽃 문살처럼 슬픔으로 깊숙하게 새겨진 조각들도 있고, 순간의 추억으로 얕게만 새겨진 문양들도 많다. 무엇보다 원망이나 후회로 새겨진 무늬가 문짝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만 같다. 칠십여 년간 쉼 없이 새겨운 문양들을 떠올리며 서툰 솜씨에 너무 예리한 조각칼로 성급하게 새긴 것은 아닌가 되돌아보게 된다. 오롯이 나만의 문양을 새기기보다 옆 사람의 무늬를 곁눈질하느라 숨이 찼고, 대중없이 크게만 새기려고 골몰하기도 했었따.
보물로 칭송받는 꽃살문에 비하면 내 삶의 문양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성스런 화엄의 세계를 내가 탐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할 것이다. 빼곡히 채우기에 급급했던 삶의 무늬들 속에서 일그러진 부분을 이제 와 다시 지울 수는 없지만, 미흡하나마 얼기설기 문양을 만들어가고 있는 내 삶의 무늬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라도 찬찬히 다듬고 사포로 문질어서 여백도 남기고, 보듬어가며 더 단단한 문양으로 조각하고 싶다. 설령 할머니의 꽃 문살처럼 슬픔으로 곡진 무늬라 해도 다채로운 문양으로 아름답게 보듬어가련다.
멀리서부터 찬불가가 들려온다. 나한전 꽃살문이 들려주는 소리다. 먼 훗날 온다는 연화장 세계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부족한 내 눈에는 꽃살문이 인간사의 갖은 업을 담아낸 민화로 비쳐진다. 다복, 다산과 부귀영화를 내려주십사 하는 축원으로 가득 차 보인다. 세월의 빛깔을 품고 있는 작은 법당문의 여섯 문짝이 큰 축복으로 와 닿는다.
꽃살문이 상징으로 가득 찬 경전의 세계가 되어 다시 내 가슴을 울려오고 있다. 심오한 세계를 다 읽지는 못하지만, 눈에 그 모습을 담아 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조용한 산사의 꽃살문이 빈 마음을 차근히 채워가고 있다. 다시 산을 내려갈 길이 고단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