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돌, 그 이름처럼 / 허정진
돌탑이다. 돌덩이를 아슬아슬하게 하나씩 포개 쌓은 외줄 탑도 있고, 둥글게 높이 쌓아 올린 원추형 탑, 갖가지 의미나 형상을 표현한 조각 같은 탑들도 있다. 무겁고 단단한 돌을 가지고 만 가지 재주를 부린 것 같다. 누군가의 노력과 끈기로 이루어진 결정체다. 왜 쌓았을까? 안녕과 복에 대한 기원이거나, 가슴속에 숨겨둔 간절한 서원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접착제 하나 없이 비바람에 흔들림 없는 돌탑이 되기 위해서는 돌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을 수밖에 없었겠다.
돌각담이나 성벽, 돌탑을 보면 크고 작은 갖가지 모양의 자연석이 서로 맞물려 하나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 그지없다. 돌끼리 견고하게 물고 물려 틈새 하나 없는 균형미와 조형미가 단연 돋보인다. 무엇보다 기초가 중요할 것이다. 몸체부를 받히는 지대석을 잘 쌓아야 빗물에도 변형이 없고 외부의 충격에 버티는 힘이 확보될 것이다. 상부의 엄청난 하중을 견뎌내려면 크고 단단한 돌을 받침대로 사용해서 처음부터 흔들림 없도록 견고하게 쌓아야 한다.
무심코 돌탑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저 무지막지하게만 보이는 받침돌이 슬쩍 눈에 들어왔다. 땅속에 몸을 약간 묻은 채 맨바닥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밑돌이다. 반지하 방처럼 축축한 습기와 먹구름 같은 이끼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있다. 돌마다 놓이는 자리가 있다고 했던가? 오래된 업(業)과 습(習)처럼 아무런 저항도, 거부도 없이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는 화려한 것만 좋아한다. 풀을 보아도 줄기나 잎보다 꽃을 먼저 보고, 사람을 보아도 숨겨진 내면보다 겉으로 드러난 외모를 중요시한다. 돌탑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위만 보느라, 높이와 외형에만 관심을 가지느라 바닥을 미처 보지 못한다. 그 아래쪽에서 윗돌을 머리에 이고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는 밑돌을 눈여겨본 적이 없다. 돋보이지도 않고, 눈길이 쉽게 가는 자리도 아니다. 비가 오면 흙탕물에 젖고, 눈이 오면 냉기 속에 갇히는 자리이다. 하늘을 나는 화려한 새와 나비가 찾지 않는, 온몸으로 땅을 끌어안고 오체투지 하듯 살아야 하는 보이지 않는 군상들이다.
어린 시절,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바닥을 보고 걷는 버릇이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조용하고, 잘 참고, 내성적이고 부끄럼 많던 성격은 분명했다. 고개를 뻣뻣이 들어 위를 보고, 장군처럼 양팔을 씩씩하게 휘저으며 위풍당당하게 걸어야 한다며 아버지는 무척 못마땅해하셨다. 자식이 남 밑에서 고생할까 봐, 세상을 손해 보고 살게 될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우리는 높은 곳만 바라보고 살아왔던 게 아니었을까. 하늘과 땅의 높고 낮음을 남녀에 비유하는 성차별처럼 위는 좋고 아래는 나쁘다는 수직적 사고에 함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관념 속에는 상하, 빈부, 우열의 경쟁 관계만 존재할 뿐 이해와 배려의 여백이 없다. 모두가 눈에 띄는 빛나는 자리를 탐하고 누구나 남보다 쉽고 편한 자리를 원한다. 그럴수록 성실과 근면은 답답하고 허세나 허영은 멋들어지게 보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윗돌이 되고자 하지만 그 자리도 든든한 밑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주춧돌 없이 집을 지을 수 없고, 받침돌이 없이 성곽을 쌓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크고 높은 돌탑도 받침돌이 흔들리거나 버텨주지 못하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차가운 바람을 달래고 등을 내밀어 윗돌을 받쳐주는 밑돌, 그 노력과 수고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사회의 구성이나 존속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윗돌이라고 밑돌의 희생적인 노고를 모르는바 아니다. 뿌리가 없이 나무가 설 수 없듯, 든든한 무게중심으로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가 있어 그 힘으로 깊이와 높이를 만드는 것임을 알고 있다. 한 치의 빈틈이 없도록 서로 끌어안고 품어주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는 과정이 있기에 천년 세월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다.
상하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여야 하지 않을까. 위아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각자의 역할이 세상에 필요한 것이다. 윗돌만으로 허공에 머물 수 없고 아랫돌만으로 높이가 될 수 없듯이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일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수평적 사고,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는 성숙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돌덩이 같은 삶의 짐을 지고 살아가면서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누군가를 위해 밑돌이 되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뒷배이자 키다리 아저씨, 문경지교(刎頸之交) 같은 일이다. 나를 희생시켜 상대를 일으켜 세워주는 숭고한 일이다. 나에게는 조금 귀찮은 일이지만 상대에게는 고통에서 해방이 되기도 하고, 나에게는 조금 수고로운 일이지만 상대에게는 생명을 지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멈출 곳 하나 없는 바다를 날아가는 철새들에게 발 딛고 설 작은 섬 하나가 되어주는 일이다.
아무 이해관계가 없어도 부모니까, 가족이니까, 친구니까 스스럼없이 밑돌이 되어준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방패막이처럼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텨낼 수 있었다. 돌아가신 지 오래된 아버지이지만, 지금도 세상살이가 막막하여 외롭고 힘들 때마다 산소를 찾으면 나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마음이 평온해지곤 한다.
받은 것이 있으니 돌려주어야 마땅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나에게 생명을 주고 이 세상을 열어준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내 주변의 친구나 동료들에게 든든한 밑돌 한번 되어준 적도 없었다. 밑돌은커녕 윗돌만을 고집하며 주인공 자리에 연연하고, 그것이 성공과 출세인 것처럼 현혹되어 살지나 않았을까 오히려 부끄럽다. 말로는 의리와 순정을 내세웠지만 정작 남의 어려움이나 위험에는 손해나 피해를 먼저 염려하고, 남의 밑돌이 되는 것을 패자라도 된 양 자존심 운운하며 기피하려고만 하지 않았나 모를 일이다.
낮은 곳에 아름다움이 있다. 험한 길 걷는 발바닥도, 개울물 건너는 징검돌도, 진흙탕에 디딤돌도 모두 낮은 곳에 있다. 차가운 바닥에 발을 딛고 저렇게 높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