낀 / 주인석
끼인 것은 애처롭다. 틈새에 박혀 꼼짝도 못하고, 무리 가운데 섞여 표시도 안 나며, 어떤 일에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관여하는 것이 끼인 것의 운명이다. 끼인 것치고 대우 받는 것은 거의 없다. 생물에서 무생물까지 끼인 것은 눈치 보며 살아야 하는 초개다. 구석구석 낀 먼지가 그렇고, 백로 무리 속에 든 두루미의 처지가 그렇고, 남의 일에 끼어드는 약방 감초 같은 이가 그렇다.
뭔가 단단히 끼여 서랍이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서랍도 상자라 마구잡이로 물건을 쑤셔 넣기만 했더니, 도대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랍과 나는 손잡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미간을 치켜 올리며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다.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던 줄다리기였는데, 서랍이 약간의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들여다보니 어지럽혀진 물건들이 서랍의 갈비뼈처럼 진을 치고 있고, 삼각자 꼭지가 서랍의 윗부분에 팔씨름하듯 걸려 있다. 조금 강하게 잡아당기니 휘어짐이 느껴졌고, 계속 당기면 부러질 것 같았다. 손가락을 넣어 봐도 걸린 부분까지는 안 닿는다. 확 잡아당겨서 부셔 버리고 싶었지만, 모든 일을 차근차근 하라고 가르친 체면에, 아이들 앞에서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는 수 없이 벌어진 틈으로 손가락에 잡히는 물건들을 하나씩 꺼냈다. 약간의 공간이 생길 때마다 서랍을 닫았다 열었다 하며 흔들어주었다. 빈공간 사이로 삼각자가 자리를 잡아 주길 바랐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서랍을 여니, 언제 까칠하게 굴었냐는 듯 삼각자는 차분히 누워 있다. 서랍 속에 끼어서 성질부리며 꼼짝 않던 삼각자가 자리를 만들어주니 누그러진 것이다. 이처럼 끼인 것들은 늘 누군가의 손을 기다린다.
보통 사람들은 사십대가 되면 끼인 신세의 절정을 이룬다. 가정과 직장, 사회생활에서 끼이지 않은 곳이 없다. 나 역시 비켜갈 수 없는 마흔 줄이다. 남편과 아이, 시댁과 친정, 부모와 자식, 지인과 지인 사이에서 허덕인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이가 되어가는 남편과 철없는 아이 사이에서 날마다 가탈을 부렸다가도 도인이 되기를 자처한다. 부어도 끝이 없는 시댁과 얻어 오기만 하는 친정 사이에서 부모의 괴리를 느끼며 부모 되기가 겁나는 끼인 며느리고 딸이다. 어버이께 효를 다하라고 배워 왔고 가르치고 있지만, 올리는 사랑보다는 내리는 사랑이 더 많아, 자식 키워 봐야 소용없다는 소리를 듣고 또 느낀다. 앞으론 이 말조차도 하기 미안해지는 날이 오지 싶어 마음이 씁쓸해진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부모를 올려다볼 줄 알고, 자식을 사랑할 줄 아는 끼인 세대지만, 자식들의 세대엔 희귀한 현상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시대의 중년들은 부모의 은혜를 눈감지도 못하고 자식의 뒷바라지를 거두지도 못하는 마음 착하면서도 어리석게 끼인 운명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 세대를 두고 '부모부양의 마지막 세대, 자식에게 버림받을 1세대'라 한다.
내가 어렸을 땐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끼어서 부부싸움만 하면 왔다갔다 말 심부름하는 로봇 노릇을 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다 들리는 말을 굳이 전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는 태어날 자식에게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고, 유전이란 이름으로 나는 그것을 받았다. 힘이 센 쪽이 약한 쪽을 누르고 염색체라는 심부름꾼을 통해 나에게 전해졌다. 두 사람사이에 끼인 유전인자를 받은 나는 남편과 부부싸움을 할 때면 누가 뭐래도 친자 확인 없이 당신들의 자식이다.
막내로 태어난 나는 부모의 편애와 다섯 언니 오빠의 눈총에 끼인 신세가 되어 눈치놀음만 늘었다. 특히 작은 오빠의 심술은 어디 견줄 곳이 없었다. 끼인 것들이 받는 자극은 가장 가까운 것일수록 심하다. 그때 받은 끼인 자국들은 아직도 내 손에 선명한 무늬가 되어 교훈을 주고 있지만, 헐겁게 하는 일보다 여전히 죄는 일에 더 익숙해져 있다.
열 손가락 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냐는 말이 있지만, 조금 덜 아픈 손가락은 있다. 엄지손가락은 새끼손가락보다 굵어서 덜 아프다. 작고 어린 것은 늘 마음이 더 간다. 부모님도 육남매를 키우면서 골고루 똑같은 사랑을 주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받고 또 받아도 더 받고 싶은 것이 사랑이리라.
부모의 사랑 앞에 질투심으로 멍들었던 손등의 자국이 늘 나를 깨우치지만 어미가 되어 아이를 키워 보니 역시 작고 어린 것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성싶다. 그렇다고 큰아이를 팽개치는 건 아니지만, 녀석은 사랑에 굶주린 분풀이를 하듯 어미만 없으면 동생을 구워삶는다. 어릴 적 나와 같은 처지가 된 작은 녀석은 애교가 구단이다. 눈치로 갈고 닦은 단증이다. 끼여서 자란 아이들은 어딜 가도 살갑고 인정스럽다. 그런 까닭인지 사람이 많이 따른다. ‘끼인’을 거꾸로 읽어보면 ‘인끼’가 된다. 이것은 고뇌와 고통을 연단으로 닦아 얻은 결과다. 이에 비해 큰 아이는 요령과 지혜를 만들어가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느낌대로 행동하고, 우직하게 움직이다 보니 애교와는 거리가 멀다.
끼여 있어서 괴로운 처지에 있는 것들이나, 끼이지 못해서 궁한 상태로 있는 것들은 똑같은 입장이다. 부모의 적절한 관심은 끼여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사이를 헐겁게 해주어 통풍역할을 한다. 관심은 나간 것들을 들어오게 하고 끊어진 것을 묶어주는 동아줄이다. 관심은 잃었던 웃음을 찾게 하고, 막막한 미래를 함께 보게 되는 영안이다. 관심은 살아 있는 것들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죽은 것들에게는 생명을 불어넣는 양약이다.
삼각자의 휘어진 꼭지가 방금까지 끼어 있었던 아픔을 말하는 듯하다. 서랍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의 무관심이 부른 죄 없는 형벌이었으리라. 지난날 나는 눈이 있어도 보지 않았고, 귀가 있어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마음자리 넓어도 펼치지 않았던 시간들이 더 많았다. 나의 이런 무관심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다치고 아파했을까. 작고 하찮은 것에서 크고 귀한 것까지 사랑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아야겠다. 그것이 애끓는 짝사랑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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