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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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적심/ 김원순

에세이향기 2023. 5. 24. 02:55

적심/ 김원순

 

 

오늘도 종일 아이비와 선로즈의 줄기를 잘랐다. 꺾꽂이 하기 위해서다. 한 달은 넘게 자르고 심기를 반복해야 할 것 같다. 구정舊正이 지나면 출하 될 꽃들이기에 나는, 딸을 시집 보내는 어미의 심정으로 한 분盆 한 분盆 정성껏 심는다.
심을 때마다 내 곁을 떠나간 수많은 꽃들을 떠올려 본다. 장미나 백합처럼 아름답진 않지만, 고단한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주는 없는 듯이 있는 꽃이다. 어느 곳에 가든지 환경에 잘 적응해서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으라며 아쉽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 보낸다. 그러나 시집을 가면 잘 사는 딸도 있고 못 사는 딸도 있듯이 아이비와 선로즈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친정어머니께서도 나를 떠나 보낼 때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시댁의 물맛과 장맛을 빨리 익혀야 된다며 낮고도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동안 서운하고 야속했던 일이나 안타깝고 가슴 쓰라렸던 일들은 모두 잊고 가라며 등을 쓰다듬어 주실 때는, 서러운 듯 지는 백목련처럼 그렇게 울었다. 눈시울 붉히며 떠나온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내 딸아이에게 친정어머니처럼 말해 주고 있으니, 세월이 무심히 흘러 간 것 같기도 하고 그 세월 속을 걸어 온 내가 무심한 것 같기도 하여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꽃들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곧 추위가 닥칠 것이라는 일기예보 때문인지 잘린 줄기들에게 자꾸 마음이 쓰인다. 뿌리를 내리려면 차가운 흙 속에 줄기를 묻고 긴 겨울을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쓰러졌다 일어서는 줄기도 있고 비틀거리다 영영 주저앉아 버리는 줄기도 있다. 그러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줄기들만이 새 하얀 뿌리를 가질 수 있기에, 겨울은 끊임없는 담금질과 채찍질로 줄기들을 일으켜 세운다. 긴 시련과 고통 끝에 얻게 되는 새 하얀 뿌리는 승리의 깃발이며 기쁨의 함성이다.
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내 손과 발은 제일 부지런하다. 부지런한 내 손과 발 못지않게 아이비와 선로즈도 지금 한창 뿌리를 만드느라 추운 줄도 모른다. 잎과 꽃망울도 줄기 어딘가에서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맨 먼저 꺾꽂이한 분에서는 벌써 새순들이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선 신기한 듯 주위를 살피고 있지 않은가.
겨울이라서 지하수를 간간이 주고 비닐하우스의 문을 열어서 찬바람을 잠깐씩 쐬어준 것뿐인데 이렇게도 앙증맞은 새순을 밀어 올려 주다니. 외풍과 연탄가스 때문에 밤잠마저 설쳤을 텐데도 아침이면 고 작은 잎을 흔들며 나를 반겨준다. 그 모습이 하도 천진스러워서 한참을 바라보곤 한다.
겨우 두서너 장의 잎을 달고서 면돗날에 무참히 잘려버린 줄기들이다. 조금 전까지도 물과 거름을 실어 날랐고, 잎과 꽃망울을 매달고서 꿈에 부풀던 어기찬 삶의 길이기도 했다. 조금 있으면 뿔뿔이 흩어질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삽목상자 속에 뒤엉킨 채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아, 살아 있는 것들의 정情이 저처럼 애틋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삽목상자 속의 줄기들에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세상살이인데 너무 슬퍼하지 마라며 축 늘어진 잎에 살짝 물을 뿌려 주었다. 금세 생기가 돌더니 줄기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신이 나 보이기까지 한다. 무참히 잘려도 다시 일어서는 강인함은 줄기 어디쯤에서 오는 것일까. 연약해 보이지만 결코 연약하지 않는 줄기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낡은 비닐하우스를 비집고 들어온 외풍이 줄기의 튼튼한 벽을 만들었고, 도타운 햇살은 줄기의 웃자람을 막아 주었다. 또 세상의 비바람에 쓰러질까 봐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오는데 나는 왜 겨울의 깊은 속내를 여태 모르고 살았을까. 제 아무리 크고 훌륭한 창이라도 벽이 견고하지 못하면 아름다운 풍광을 담지 못한다는 것을 저 작은 줄기에게서 배우곤 한다. 어쩌면 내 삶의 기둥과 벽이 되었을지도 모를 줄기를 한 움큼 쥐어 본다. 참으로 따뜻하다.
줄기를 자를 때마다 제멋대로 뻗다가 뒤엉켜버린 내 삶의 줄기를 함께 잘라버리고 싶었다. 햇빛이 없다고, 자리가 나쁘다고, 물과 거름이 모자란다고 늘 타박만 해오던 오만한 줄기들을 과감히 걷어내고 싶었다. 내 삶의 줄기에 가려진 연약한 생명들에게 바람과 햇살을 흠뻑 마시게 해주고 싶었다. 이렇게 하고 싶은데 저렇게 해버리고, 이 길로 가고 싶은데 저 길로 가버리는 나를 믿고 따라온 줄기들의 삶이 또 얼마나 위태롭고 막막했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잘리는 아픔보다 잘려진 만큼 늘어나는 가족들을 보며 행복해 하는 줄기들은 내 삶을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쪽으로 세워 놓는다. 삶이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양지가 되기도 하고 음지가 되기도 한다며, 사각 틀 속에 갇혀 사는 나를 늘 안타까운듯 바라보던 줄기들이다. 그러나 이젠 나를 보아도 한숨 짓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뒤엉킨 줄기들을 걷어내거나 잘라버려도 담담히 일어서기 때문일까.
식물의 줄기를 자르는 것을 적심이라고 하는데, 적심을 해준 분盆들은 마치 출발선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는 마라토너 같았다. 새 삶을 펼치기 위해 자신과의 부단한 싸움이 시작될 멀고도 험난한 길을 응시하는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고 칼처럼 단호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출발선에 서서 총소리와 함께 달려 나가선, 내게 남은 길을 끝까지 완주하는 멋진 마라토너가 되고 싶었다.
나는, 잎과 줄기가 두터운 양지쪽 화분의 줄기를 자를 때보다, 키가 들쑥날쑥 하거나 희멀거니 목을 뺀 음지쪽 화분의 줄기를 자를 때 더 큰 보람과 희열을 느낀다. 세월의 아픈 흔적들을 말끔히 걷어내어 새 둥지를 틀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햇빛과 바람이 넉넉하지 않아도 한 번도 볼멘소리를 하지 않는 음지의 화분에게, 가지고도 더 가질려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적심을 해준 음지의 화분들을 양지로 옮겨 주었다. 그러자 눅눅해진 내 삶도 양지에 널어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싶었다.
적심을 할 때마다, 삶이란 자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자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탯줄을 자르고 나왔다가 어느날 문득 소리없이 가버려야 하니 말이다. 한 자루의 연필도 나무의 탯줄을 자르고 나왔듯이, 거미줄처럼 뒤엉킨 길과 터널들도 산과 언덕을 자르고 태어났던 것이다. 자르지 않고선 존재할 수 없는 냉엄한 삶의 법칙 앞에서 그 무엇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름조차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적심이 조용히 일러 주곤 한다. 삶이 끝나는 날, 야속하고 막막한 내 손에 길러진 꽃들에게 둘러싸여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싶다.
자른다는 것은,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하지만 또 한 생명을 사라지게 하는 아름답고도 슬픈 몸짓이며, 마음 속의 파문이자 울림이기도 하다. 오늘따라 면돗날을 쥔 손에 부쩍 힘이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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