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뚜막/ 황윤자
반질반질한 모습에 세월이 닦여 있다. 김호 장군 고택의 부엌에서 살아온 종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모습을 보니 사백년 역사가 꿈틀거린다. 14대의 대가를 이어온 기나긴 세월을 함께한 바짝 마른 부엌 바닥과 다부진 종부의 모습에서 지나온 삶을 대변 해준다. 부뚜막에서 종부의 일생이 흔적으로 나타난다.
옹기종기 앉아 부딪치며 싸우던 그릇들의 쉼터인 살강도 텅 비어 있다. 다라이나 소쿠리, 음식을 차려 먹는 판들의 보금자리 시렁도 주인 잃은 세월 속에 외로워하는 건 마찬가지다. 옛날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뀌어 버린 깔끔한 부엌이다. 큰방으로 이어지는 작은 부엌문은 이제 생명을 다한 모양이다. 엄마가 밥하는 모습을 보는 문이다. 그런데 물건으로 막혀 열리지 않는다. 문살 틈 사이에 쌓여있는 먼지들만 반가운지 뽀얀 얼굴로 손님을 맞이할 뿐이다. 텅 빈 가마솥과 닳아서 때가 끼어 있는 반질반질한 부뚜막을 보니 온갖 삶의 흔적이 있는 듯하다. 부엌 가마솥에 내 삶이 보인다.
나는 어린나이에 일찍 결혼을 했다. 여자로 태어나서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워야 시집가서 '부모님께 욕을 얻어먹지 않는다고' 하나하나 가르쳐 주신 자상한 아버지가 계셨다. 부엌에 들어가면 솥뚜껑 소리 크게 내지 않고 얌전하게 음식을 해 내야 된다는 예의 까지 철저하게 가르쳐 주었다. 부뚜막에 도마를 놓고 무채를 썰면 기본이 되는 처음을 얇게 썰면 마지막도 얇아진다고 하셨다. 가자미회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내가 보는 앞에서 채를 자주 설었다. 아버지가 엄마보다 더 많이 가르쳐 주셨다. 덕분에 나는 시집살이가 수월했다.
나는 시집 제사 음식을 할 때마다 가마솥에 전을 부친다. 아궁이에는 불을 지피고 부뚜막에는 나무토막 하나에 엉덩이를 의지하며 그 많은 제사 음식을 다했다. 아궁이의 불이 활활 달구어지면 가마솥에 소금을 한 주먹 넣는다. 모든 찌꺼기를 짚을 돌돌 말아 가마솥을 말끔히 소금으로 닦아낸다. 모든 것을 닦아내는 맑은 마음으로 가마솥 청소를 말끔히 한다. 그 다음에는 작은 무를 반으로 잘라 그릇에 식용유를 넣고 가마솥을 반질반질하게 문지르며 질을 낸다. 처음 구운 전은 실패하기가 일수다. 몇 개 굽고 나면 맛있는 전이 나온다.
겨울에는 부뚜막이 엄마 품안처럼 따뜻하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전을 부치니까 부뚜막 위에 연기가 심하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있다. 아궁이의 연기, 가마솥의 기름타는 냄새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만든다. 밖에 잠깐 나가 눈물 닦고 들어오는 사이 전이 새까맣게 타 버린다. 그 전을 어머님 몰래 정신없이 수습했던 기억이 나서 혼자 미소를 지어 본다. 가마솥은 불에 달구어져 있어 귀퉁이에 잘못하다 부딪치면 살이 익어 버릴 정도다. 따뜻한 부뚜막에 앉아 엄마가 밥하는 모습이 그리운 신혼 초였다.
요즘은 부뚜막은 사라졌다. 편안하게 앉아 전기 후라이팬으로 전을 굽는다. 그런데도 며느리는 눈이 맵다며 문이라는 문은 다 열어 놓고 밖으로 들락거리며 난리다. 옛날 부뚜막 대신 따뜻한 방바닥에 편안히 앉아 전을 굽는 며느리를 보면서 시대가 변했음을 느낀다. 젊은이들은 제사음식을 잘 못하는데 비해 며느리는 음식을 잘하는 편이다. 며느리가 옛날 부엌의 부뚜막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세대다.
"살강은 그릇을 씻어 물을 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설거지는 우물에 물을 뜨다가 그릇을 씻고, 시렁은 큰 물건들을 올려놓는 곳이다. 그때는 부뚜막이 식탁이 되어 보리밥 한 덩어리 찬물에 말아 풋고추 따다가 고추장에 찍어 먹는 그 맛까지"
나는 상세히 설명을 했다. 우리 어머니 시대는 얼마나 더 큰 고생을 하셨다. 어려웠던 할머니 시대가 있었기에 지금이 있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대는 여자들이 편안한 시대임은 확실하다. 옛날의 힘든 삶을 상상하며 고부의 대화가 시대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진다.
부뚜막은 아버지의 역할도 했다.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는데 부엌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려 들어보니 그 소리는 엄마 소리였다. 나는 부엌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그때 엄마는 동생이 나오려고 했던 모양이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길 위에서 허덕이고 있는 모습이다. 부뚜막을 잡고 통 사정을 하듯 신음하고 있었다. 부뚜막에는 엄마의 땀이 흥건하고 고통스런 얼굴에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나는 무서워서 울면서 밭에 일하러 간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밭에까지 어떻게 달려갔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부뚜막은 엄마의 산고를 같이 해 주었던 고마운 곳이기도 하다.
부뚜막은 다양한 쓰임이 되었다. 의자도 되고, 가끔은 엄마의 눈물을 볼 수 있었던 곳 이었다. 부뚜막은 힘 들 때마다 함께 있어주는 따뜻한 친구다. 부뚜막에 걸터앉아 숭늉 마시며 수다 떠는 포근한 부엌 찻집 역할도 능숙하게 해내는 곳이다. 세월이 흘러 부엌은 완전히 바뀌었다. 부뚜막이 산뜻한 씽크대로 탈바꿈 되었다. 음식을 조리하고 설거지를 할 수 있는 단순한 부뚜막이 되었다. 부엌 찻집 역할은 식탁이 대신하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옛날 부뚜막이 그립다.
대가의 종부를 생각하며 맞 종부의 일은 예사롭지 않다. 일 년에 열세번이나 되는 많은 제사를 사당에서 지내고 손님 접대까지 하는 종부의 삶이 그려진다. 집안을 관리하고 된장 고추장 조청까지 자기 손으로 척척 해 낸다고 한다. 깡마른 종부, 무언의 삶에 비하면 나는 못 살았지만 쉬운 삶을 살아 왔지 않나 싶다.
김호 장군 고택의 부엌은 사백년이 넘도록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부뚜막에 놓인 책꽂이에 책들을 본다. 신세대 종부답게 독서의 자리를 마련했다. 깨끗한 부엌이 현 시대와 과거를 조화롭게 만들어주는 듯 화사한 느낌이 든다. 가끔 습기가 있어 아궁이로 불을 지펴 부뚜막의 습기를 제거한다. 반질반질한 부뚜막에 지나온 종부의 삶이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