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
박경주
밀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란다. 밀과 가라지는 자랄수록 구별 되지만 그 뿌리가 서로 엉켜있어 가라지를 뽑다 밀이 뽑힐 위험이 크다. 가라지를 추수할 때까지 그대로 두는 것은 성급하게 가라지를 뽑다가 행여 서로 엉킨 밀을 다칠까 저어해서일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밀을 위한 배려지 가라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창문을 열자 계절은 어느새 가을이었다. 하늘엔 흰 구름 흘러가고 어지러이 날아가는 고추잠자리. 그래, 하늘엔 고독은 없다. 고독하려면 내게로 오라. 커피를 뽑아 들고 베란다 창문 앞에 막 섰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속 남자는 곧 내 이름을 확인했다. 누굴까? 들었던 목소린데…. 목소리의 주인공이 40년 전의 제이라는 것을 알고 나도 모르게 “아니!”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살아가기 막막했을 때, 희망이 사라졌다 느꼈을 때 그가 떠올랐다. 내 결혼이 왠지 잘못됐다 여기던 젊은 날, 시댁과 소원할 때마다 그를 생각했다. 가끔은 꿈속에서, 가끔은 아기를 업은 채로. 싱크대 앞에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숨죽이며 울었다. 되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지나간 젊음은 저만치서 측은한 표정으로 나의 오늘을 바라보곤 했다. 잊지 못했던 거다. 결혼이란 무덤이 나를 끝없이 속이고 있을 때 그 시간 속에 그는 살아 있었다.
남편과 사별한 후 한 번쯤 연락이 닿았음 했다. 그의 직장을 모르지 않기에 마음만 먹으면 그건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먼발치나마 보고 싶기도 했다. 꼭 한번 만나 묻고 싶은 말도 있었다. 어느 날 훌쩍 떠난 이유가 무엇이냐고? 왜 그랬냐고? 하지만 아니 될 일이었다. 한 번이 두 번, 그리고 세 번으로 이어진다면 절대 아니 될 것이었기에. 그런 그가 전화를 걸어오다니…. 그는 나의 근황을 차근차근 물었다. 만나자고 했다. 이 나이에 무슨 허물이 되겠냐고도 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제발 오해하지 말아 줘.”
“….”
“그렇게 떠난 건 아버지 때문이었어. 죽기 전에 그 말은 꼭 전하고 싶었어.”
“….”
나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아버지가 먼저 떠나 달라고 사정을 하셨어. 내 딸은 내가 책임질 테니. 떠나만 달라고. 제발 먼저 떠나달라고.”
그의 오래 참았던 말은 계속 되었다.
‘아, 그랬었구나. 식구들은 모두 나를 속였던 거였어. 제이는 신의가 없는 나쁜 사람이랬잖아.’
당시 아버지는 병상에 계셨다. 거동이 불편해 간신히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던 시절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지팡이를 짚고 그의 직장을 여러 번 찾았다고 했다. 병환 중이기에 당시의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한 집착이 무척 강했다.
남편이 땅에 묻히던 그날, 아버지는 나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모두 내가 진 죄의 업보다. 나를 용서해라.”
그 말의 의미가 심상치는 않았지만 묻지는 못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알아 무엇 하리.
제이는 큰오빠의 대학 동창. 둘은 대학 졸업반에 이르러 대기업 채용시험을 같이 보았다가 제이만 합격을 했다.
“맛이 어떠냐?”
제이가 그날 오빠 자존심을 건드렸다. 아, 그가 이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 후 오빠는 제이를 무척 싫어했다.
제이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다. 저녁을 먹고 가곤 했던 그. 나와 마주치는 일도 잦았다. 말도 걸어왔다. 언젠가 부터는 나의 직장으로 전화를 해 데이트를 하게도 되었다. 당시 트렌치코트를 즐겨 입던 제이는 참 멋있었다. 어진 눈과 매너 있는 말씨. 그의 행동엔 나를 향한 배려가 듬뿍 담겨있었다. ‘젊음’이 사랑을 만나자 이내 아름다운 불꽃을 이루었다.
말리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랑이라던가. 식구들의 만류가 사랑의 불쏘시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사이좋던 큰오빠와도 자주 부딪혔다. 내게 참 다정한 오빠였는데. 적어도 내가 제이를 만나기 전에는. 모르긴 해도 오빠의 푸념은 나보다는 필시 아버지를 자주 향했을 것이었다. 큰오빠는 부모님의 전부였다. 맏아들에 거는 부모님의 마음은 신앙과도 같았다.
“이놈아. 너는 그놈이 그렇게 좋냐. 아버지보다 더 좋냐. 아버지가 죽는대도 그놈이 좋냐.”
아버지는 화가 나면 나를 ‘이놈’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냐? 그놈이냐? 누가 더 좋아?”
당연히 제이가 더 좋았다. 집안의 갈등을 없애고자 아버지는 서둘러 가라지를 뽑으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몰래 제이를 만나러 갔던 것이리라. 제이를 내게서 서둘러 뽑았을 것이다.
밭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이었다. 농부는 밭을 일구고 밀알을 가꾸지만 밀을 위한답시고 가라지를 함부로 뽑진 않는다. 그 엉킨 뿌리까지 생각하는 세심함이 더 많은 밀을 수확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과 악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끝없이 선을 추구하지만 선과 악의 뿌리도 밀과 가라지처럼 엉켜 있기 마련이다.
아버지가 뽑아낸 가라지가 내게는 얼마나 아름다운 밀알이었는가. 박복한 내 생을 돌아볼 때 아버지는 오히려 나라는 가라지를 제이에게서 뽑아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운명’이라고 나는 부른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뚜막/ 황윤자 (4) | 2023.05.24 |
---|---|
적심/ 김원순 (1) | 2023.05.24 |
어느 가을 햇살 아래/남홍숙 (2) | 2023.05.21 |
기다리는 집/조현미 (1) | 2023.05.21 |
울음을 풀다/임이송 (1) | 2023.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