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어느 가을 햇살 아래/남홍숙

에세이향기 2023. 5. 21. 21:26

어느 가을 햇살 아래/남홍숙














 그곳 봄, 이곳 가을에 홍고추 15kg을 말리기로 했다. 코로나19가 식료품 해외배송까지 저지해서다. 우선 고추박스를 햇살 가득한 마당에 풀어 헤쳐 놓았다. 노루꼬리만치나 짧다는 가을볕이 아까워서 나도 고추랑 가을빛이랑 같이 어울리며 작업을 즐기기로 했다. 고추는 하나같이 우량아처럼 미끈하고 길쭉하게 잘 붉었다.


 ‘태양의 나라’라는 이국의 햇빛은 말 그대로 ‘땡볕’ 이어도 고추만 이쁘게 잘 마르면, 난 끓는 듯 뜨거운 볕을 괴의치 않으련다. 그놈들 하나, 하나씩을 행주로 닦은 후 세 등분으로 길게 가위질을 하다 보니 손에 물집이 생겼다. 코는 맵고, 눈은 가렵고, 얼굴은 화끈댔으나 아랑곳 않고, 붉은 조각으로 잘게 잘린 그놈들을 조각보 깁 듯 둥글고 파란 멍석에다 빽빽하게 눕혔다. 원의 중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원심을 그리듯 둥글게 만들어 나갔더니 그놈들은 햇살과도 잘 어울린다. 뭔가 참신하다. 멍석이라 해봤자 분당에서부터 따라온 파란 우비를 자르고 기워 만든 건데, 품이 크고 팔이 도포자락처럼 넓어서 멍석으로 안성맞춤이다.


 하늘색 바탕에 동그랗게 널린 홍고추를 보다니, 마치 지상에 뜬 태양 같은, 내가 뭐 대단한 ‘내추럴 아티스트’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이 기분도 잠시다. 타는 듯 뜨겁고 매운, 하늘과 지상의 두 태양 속에 들어, 작업에 열중해야 한다. 매캐한 붉은 조각 하나, 하나씩 들어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듯 그놈들을 모로 눕혔다 우로 돌려주기에 바빴다.


 나의 등 위로 가을바람이 지나갔으나 이 나라 이글거리는 태양을 냉각시키기엔 역부족이다. 그래도 고추의 등은 스치는 갈바람에 의해 가열차게 마르고 있었다. 고추의 몸은 건조되면서 진홍으로 변색되어가고, 빽빽하던 공간엔 틈이 조금, 조금씩 생긴다. 고추가 자신의 표면적을 줄이고 있어서다. 왠지 난, 나 스스로가 대견해졌다. 아주 기찬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은 흥이 내면 가득 차올라, 콧노래까지 나왔다. 삐에로의 코처럼 점점 빨개지는 그놈들 하나하나를 정성을 다해 매만지니, 가을빛까지 나를 도와준다.
홍시 빛 노을 질 무렵에야 그놈들을 베란다 탁자위로 옮기고, 샤워 룸 거울을 보니 내 얼굴이랑 팔뚝도 검붉게 타 있었다. 가슴은 설레었다. 침대에 들어 눈을 감아도 그놈들이 어른거렸다. 밤바람에 날아가진 않을까, 하며 베란다로 나가보았다. 그놈들은 별빛을 덮고 새빨갛게 까무룩 잠들어있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15년 동안 살던 평택 과원의 밤하늘에도 별빛이 돋아있었다. 그땐 별빛이 가슴을 데워주진 않았다. 그 당시에 난 그저 고추를 말렸었다. 다 말라가던 고추 위로 밤중에 폭풍우가 내리쳐서 두어 가마의 고추가 곰팡이로 돌변하던 경험도 몇 번 있었고, 옥상 콘크리트 바닥에서 샛노란 씨앗을 달그락거리던 그놈들을 세 아이들과 포대 자루에 옮겨 담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던 날도 난 보랏빛 등꽃 그늘 아래서 건고추의 꼭지를 따고 있었다. 두 살 배기 막내는 온 마당을 휘저으며 아장아장 걸어 다녔고, 난 추석날 고향의 시모에게 전해 줄 고춧가루를 염두에 두고 한 눈으로는 홍고추 무더기를, 다른 한 눈으로는 천지분간 못하는 내 아가의 꽁무니를 쫓으면서, 조금은 부산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 와중에 불현듯 하늘이 무너지는 비보를 들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내게 현실은 예고 없이 잔혹하게 왔다.


 28년이 지난 그날의 일이 어쩜, 나의 삶을 송두리째 장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붉은 고추만큼이나 맵고 축축한 시간들은 건조되고 빻아지는 경험을 거듭하고 있다. 그럼에도 제 생을 우리네 먹거리로 기꺼이 내어놓는 이 거룩한 모습은, 뭇 삶의 한 단편이기도 하다.


 내일도 난 내게 할당된, 가슴에 얼얼하게 찍힌 화인 같은 붉은 고추를 말릴 거다. 가을햇살이 아무리 아깝다 해도, 볕을 너무 욕심내면 고추가 까맣게 타버린다. 고추에 스민 빛과 바람, 밤과 낮의 시간에 의해 고춧가루의 향과 맛과 색이 달라진다. 이놈들이 양념을 적절히 잘 버무리도록 돕는 게 지금 나의 책무다.


 가끔 어두운 문 앞에서, 때론 밝은 빛 속에서 서성거리던 젊은 날부터의 응축된 시간들이, 이국의 빛과 바람을 빌어 온전히 가벼워지는 이놈들을 보면서, 잠시나마 나 자신을 응시하게 한다. 지금도 제 몸피를 줄이면서, 제 향과 색과 맛을 응축하는 이 식물을 보면서, 이놈들도 여전히 소망이 살아있는 생명체가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한다.


 나도 이놈들처럼 내 향이 내 몸에 적절히 쌓이면 언젠가는 내 몸도 건조되기 시작할 것이다. 아니 이미 건조가 시작되었을 테다. 어쩔 수 없이 내 밤과 낮의 시간이 적재된 향이 몸을 타고 고스란히 배어나올 테다. 우선은 이놈들이라도 부패되지 않고 빛 고운 향으로 잘 마르도록 손질을 해야겠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심/ 김원순  (1) 2023.05.24
가라지/박경주  (1) 2023.05.22
기다리는 집/조현미  (1) 2023.05.21
울음을 풀다/임이송  (1) 2023.05.21
모닥불 속의 개미들/솔제니친  (0) 2023.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