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의 色
마경덕
나사를 죄듯 가지에 꽃을 꽂던 장미, 꽃잎과 꽃잎을 겹겹으로 감싸고 봄부터 아름다운 풍경을 지었다. 꽃의 배경은 사람들이었다. 서로를 밀착한 조밀함이 아름다움의 근간이었다. 꽃잎을 포개 봉긋봉긋 가지에 봉오리를 짓고 마침내 한 송이 꽃이었다.
꽃과 축제로 붐비던 강변 장미정원도 이제 호젓해졌다. 빛의 뒤편이 어둠이듯이 색(色)중의 색(色), ‘빨강’은 가장 곱기에 가장 ‘슬픈 색’이다. 나아갈 길이 없고 더는 보여줄 것이 없는 절정(絕頂)은 불안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대책 없이 활짝 피어버린 꽃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초조한 기색이 보인다. 한발 더 나아가면 아득한 벼랑인데 그만 멈추고 싶은데 멈춰지지 않는다. 여기저기 만발한 근심들, 팽팽한 긴장에도 꽃잎의 간격은 느슨해지고 가을 오후 햇살에 장미공원에 서서히 금이 가고 있다. 움켜쥔 힘이 빠져나가 조금씩 헐렁해지고 있다.
사랑도 간격(間隔)이다. 기대고 안아주고 싶은 마음엔 틈이 없다. 볼을 비비고 보듬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춘다. 그래도 부족하다. 더 뜨겁게 불타고 싶어 백 송이의 장미꽃을 선물한다. 이파리 뒤에 숨은 가시도 두렵지 않다.
하지만 변수가 있다. 느닷없이 변심이 끼어들고 마음이 멀어지면 밀착된 관계는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토록 곱던 꽃물이 누렇게 바래고 두 사람 사이로 찬바람이 드나든다. 한자리에서 벌어지는 필 때와 질 때, 밀어내는 것과 밀려나는 것, 시작과 끝은 사뭇 다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밀려나야 할 때 누군가는 생살이 찢어진다. 그렇게 내쳐진 상처는 끝내 아물지 않는다.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에서 하루를 더하면 꽃이 진다. 열흘은 입에 물고 무덤까지 가야 하는 말. 열하루는 낙화이거나, 낙하이거나, 추락이다. 기어이 열흘을 꺼내는 건 공들여 짠 비단을 찢는 일, 두 손에 핏물이 들지 않고 어찌 마음을 찢을 수 있을까. 목을 늘어뜨리고 차마 지지 못한 꽃들. 열흘의 色으로 마지막 말을 남긴다.
시들어가는 꽃은 벌어지는 틈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가차 없이 꽃을 버리는 나무의 작심(作心)을 어찌 다 받아 읽을까. 꽃잎을 찢는 것은 손에 핏물이 드는 결심이니 핏물과 꽃물이 어찌 같지 않으랴. 막막함, 두려움, 처연함이 낙화에 있다. 예정된 결별은 사랑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는 법, 이별은 찰나에 덮친다. 거대한 해일, 급류에 허우적거리며 끝까지 떠밀려 가야 한다. 피를 바치거나 쏟아야 했던 그토록 간절했던 사랑도 어느 지점에서 마법처럼 사라진다. 대부분 아찔한 절벽이거나, 길이 끝나는 곳에서.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누군가를 미워했다는 말이다. 죽도록 사랑했으면 죽도록 미워했다는 말이다. ‘열흘의 색’은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는 지점이어서 열흘의 끝에서 꽃은 입을 다문다. 발설하지 못한 말을 삼키고 자진하는 꽃들, 낭떠러지 아래 애써 지은 마음을 던져버리는 단명의 꽃들, 모두 ‘열흘의 色’이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지만 또 다른 시작은 많이 앓아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다. 슬픔은 어떤 이유로도 완성되지 않는다. 느리게 느리게 지긋지긋 흘러가는 것이다. 불현듯 가슴을 쿡쿡 찌르며.
꽃잎의 마지막 몸짓은 우아하다. 여인의 속살 같은 꽃잎들, 어미에게 배운 꽃의 예법대로 꽃은 바람에 흩어져도 꽃답게 진다. 바람을 붙잡고 사뿐 허공을 걸어 내려오는 부드러운 착지를 들여다보면 뜻밖에 치열한 몸짓이다. 꽃의 예절을 밟고 지나가는 발자국마다 꽃의 피가 흥건하다. 그렇게 믿었던 사랑에 밟힌 멍자국처럼.
낙화는 체념이다. 더는 사랑을 향해 마음이 작동되지 않을 때 낙심한 꽃은 시든다. 꽃잎이 붉어 이별은 참혹하다. 처참하게 허물어지는 강변의 장미들, 눈자위가 붉은 꽃은 그렁그렁 눈물이 많다.
줄기마다 가시를 품은 꽃들, 꽃잎에서 피 냄새가 난다.
[출처] 열흘의 色 / 마경덕|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