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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계단 외 9편 / 박일만

에세이향기 2023. 9. 26. 02:49

계단 외 9편 / 박일만 

 


이 발밑에 단단한 짐승은 무엇인가
꼿꼿한 등뼈를 자랑하며 앞발을 치켜들고
부동자세의 근본을 마스터한 짐승
누군가는 이 길을 따라 출세에 오르고
누군가는 이곳을 거쳐 퇴장도 했을
땅속에 아랫도리 깊이 박고 포효하는 짐승
수많은 발들이 육중하게 오가도
끄떡 않는 선천성,
힘과 근육이 적나라한 태생이다
난간을 레일삼아 층층이 달려가는 고속열차다
시간도 여기서는 힘을 보태며
생의 속도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멈춤을 모르는,
질주에 익숙한 근성
한때 나에게도 저런 유전자가 있었던가
이곳에 기대어 상승의 욕망을 키운 적 있었던가
등뼈를 타고 오르내리는 식솔들의 눈총을 맞으며
숨차게 페달을 밟기도 했겠지
건물 한 곳을 덥석 물고
출세를 향해 돌진하는 짐승
어설픈 처세에나 골몰하며 살아 온 나,
어리석은 짐승

 

 

 



모퉁이 수선집


골목은 늘 객관적이다
희망을 켜 놓은 듯 백열등 밝혀 둔 좁은 공간
의족을 수선실 바깥으로 길게 걸쳐놓았다
바닥까지 검정물 든 손을 탁,탁 치며, 이제 그만 해야죠
그만둬야죠,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초로의 사내
십수년인 듯 굵어진 손마디가 고집스럽다
피곤한 구두를 벗어 수선을 맡기는 저녁 무렵
내 구두는 이제 항해를 끝낸 폐선처럼 어둡다
좀처럼 광택이 살아나지 못할 거죽으로 찌그러져,
능동적이지 못한 내 성품을 비웃듯 손 빠른 사내
해진 일상을 기우고 봉긋한 광택을 생산한다
허리춤을 꾸욱 찌르고 견고한 실로 혈관을 심고
벌겋게 온몸을 지지고 닦아 환하게 빛을 복사해 낸다
속내를 보이진 않지만 손에 친친 광목을 감으며 말하겠지
자, 다시 한번 가면을 쓰고 살아 보세요
그래도 세상은 적당히 가리면 살만 하잖아요
구석에 앉아 왁스에 취해 밖을 바라본다
이 거리에서 오래오래 부대끼며 살아온 나
그만 둬야지, 이제 정말 쉬어야지 하면서도
끝내 꽃피우고 싶은 무화과나무 척박한 거리 모퉁이
천천히 아주 객관적으로 어두워 간다  

 

 



장외場外


그들 모두는 바람 든 가슴을 가졌다
허기로 잔을 채우고
사내들은 세상 고샅에서 닳아 온
지문을 찍어대며 잠시 태생을 잊는다
가슴 부딪는 건배가 오가고
출렁대는 밤별을 무수히 담아
신산한 일상과 섞어 마신다
사내들 몸속을 파고드는 말간 전율,
그들은 늘 중심에서 비켜 있었으므로
생의 언저리에서 자주 굴절되던 의지를 세우려고
한낮을 달려왔는데 외려 비틀댄다
주고받는 삶의 지론이 왁자한 공간 속
비워내는 가슴에 고단함만 가득 쌓인다
일용직이든 공사판이든 그마저도
나날이 줄어 가는 저 화려한 세상,
전등 빛이 깜박이며 시간을 다그친다
더러는 멱살을 쥐다 가고
더러는 악다구니를 쓰다 자정 넘기면서
몇 방울의 불티까지 기울이는 술잔
속내를 비우자 주위에는 난장판만 남는다
포장 밖으로 튕겨져 나온 사내들 등 너머로
새벽이 비척비척 밝아오고 있다  

 

  

 

커튼

 


입주부터 함께 산 여자
목덜미를 깨물며 어깨를 할퀴며
공중에 척, 묘기를 부리고 있네
아침저녁 번갈아 얼굴 바꾸며
잘 살아보자고, 엉켜보자고
쓰리거나 우울한 내 속을 다독이고 있네
계절마다 새로운 풍광을 보여주며
나의 온갖 냄새에 향수도 뿌려주고
습성과 비리를 세상에 소문도 잘 내는 여자,
장막이라 부를 수 없네
이곳 안에서 몸을 섞고 아이를 낳고 생을 꾸려 왔네
치마를 펼쳐 가정사를 산뜻하게 가리고
하루 두 번 속곳을 보였다 가렸다 하는,
쓸데없이 힘만 센 내 거시기도
행위도 함께 즐긴 여자
평생을 그렇게 긴 치마 한 벌로
나를 붙들어 논 여자, 한 폭의 여자
 

 

 

 


이장移葬


무척이나 불편하셨겠다
늑골이 무너져 누우신 자리에서
잊는 법을 터득하는 중이신가
염을 했던 허물까지 벗으신 채
의치를 내보이며 웃고 계셨다
가지런한 뼈 사이에서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
식솔 거두시랴 객지 생활하시랴
늘, 바람 속에 집을 짓고 사셨지
실향의 비탈진 삶
그러나 애써 호방하시던 성품,
이제 그만 세상의 업보를 푸세요
꽃 덮고, 햇빛 덮고
고단한 마음 부려놓고 바람처럼 잊으세요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어요
천근만근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며
하산하는 길
희끗한 머리카락 몇 따라와 기척을 했다
아, 아버지!  

 

 

 






불의 뜨거움 속에서
순함을 다스려 우려낸 몸이다
저잣거리를 떠도는, 다분히
천박한 태생이었으나
짙푸른 분노를 두드려
날카로움을 얻었기에
그 품성이 매사에 도리를 다하는
촌부의 둥근 갈비뼈를 닮았다
그러하니 암흑 속에 몸을 던져
세상을 세우고자 하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오늘 밤
한 시대의 어둠을 삭혀 횃불을 높이 드는
선지자의 눈빛이여, 이것은
침묵을 섬기는 몸
짙푸른 분노를 두들겨
날카로움을 안으로 숨긴
지혜의 둥근 덩어리
 

 

 


나무 가족사


덕유산 향적봉
능선에 터를 잡은 노간주 일가
어미는 이미 늙고 병들어 수척했고
갈라진 자궁 틈에 자식을 낳아 키우고 있었다
핏기 가시고 관절 꺾이어 반쯤 몸 기울인 어미,
어미의 가랑이 밑에서 자란 새끼나무 몇몇,
장성한 자식들이 기막히게 뻗은 손에 기대어
버티고 있었다
간신히 숨 붙어 있는 어미를 자식들이
양손 겨드랑이에 넣거나 어깨를 받치고,
어미도 곁의 자식들에게 마지막 남은 온기를
건네주고 있었다
칠십 평생을 찬바람 속에 살면서도
가슴은 늘 자식들을 덥히신 어머니,
어머니를 한 번이라도 그렇게
안고, 업고 부대낀 적 없는 나만 부끄러웠다
능선 길이 내내 울컥 차올랐다

 

 

 


풍선미학


살아오는 동안 눈치 채지 못했다
아내를 안아보면 남모를 공간이 출렁
속살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 난다
이를테면
내 가슴을 찌르던 장밋빛이라던가,
햇살 꽉 찬 빛구슬이라던가,
먼발치에서도 환한 꽃사태라던가,
몸을 빠져나간
바람은 이제 무엇으로 남는가
무한대천 세상에서 인연 닿아
살 맞대고 살다 갈 우리
헤아려 보면 무엇으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데
사람살이가 저 혼자 빛나는 것은 아니어서
서로 몸 부비며 사는 것이어서
주름진 몸 거기 뼈 마디마디에
웃음과 회한과 시끄런 강물소리 뒤범벅이다
헛헛해진 생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 바람, 바람
잡아라!

 

 

 


소금밭 은유隱喩


썩지 않을 구석이 남아있을까
방부된 이성과 감성
소통할 수 있는 다리 놓을 수 있을까
안으로 단단해진 심장에 뿌리내리고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작은 꽃
물줄기 찾아 떠돌던 바람의
푸른 빛깔도 머무는 구나
부식의 상처 덮어주며 어깨도 받쳐주는
중심이 서릿발로 피는 꽃, 피는 자리
정수리를 밝히며 햇빛을 삼투하는
백색의 순결함이 등고선을 이루었다
비상하는 자세다
흙살을 가장한 구린 구석도 이곳에서는
무채색을 띨지 몰라
바닷새가 까딱대며 집착을 물고 간 거기
가장 가벼운 최적을 향해 익어가는 소금 더미
짜게 혹은 깊게 폐부에 와 닿는,
나도 이제 썩지 않고 절여질 수 있을지
흰 꽃잎 번지는 의식이 솟구친다
체중만큼 환하게 속으로 피는,



전조등을 켜면


스쳐 가는 눈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바퀴가 지배하는 긴 풍경과
일렬로 진군하는 가로수에 가위눌린 사람들
주름진 일상을 볼 수 있을까

전조등을 켜고 훑어 봐도
접점을 잃은 삶엔 평행선만 이어질 뿐
바퀴가 가르는 바람의 살덩이가
길바닥 위에 흩어지며 아픈 소리를 지른다

얼마쯤 가면
내 남루한 삶의 배경도 볼 수 있을까
조각들로 기워진 보도블럭 위 토악질 자국에
목울대를 넘어오는 신산함을 삼켜본다

얼마나 밝아야
손금에도 없는 후생,
쇼윈도에서 사계절 내내 웃고 있는 가족사진
식솔들의 전생까지 읽어 낼 수 있을까

둥근 빛에 갇히는 안개의 입자들, 사람들
밤 무지개가 환하게 피는
전조등을 켜면
어둠에 휘말려 속수무책인 현생이
머~언 발치로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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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만 시인 - -

· 전북 장수 출생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詩) 수료
· 2005년 『현대시』등단
· 문화예술발전기금 수혜(2011, 2015)
· 시 집 『사람의 무늬』,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 홈 피 http://www.zaca.pe.kr
· 이메일 zaca@g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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