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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리밭 외 2편/사윤수

에세이향기 2023. 9. 24. 12:52

청보리밭 외 2편

 

이 짐승은 온몸이 초록 털로 뒤덮여 있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초록색이어서

눈과 코와 입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초록 짐승은 땅 위에 거대한 빨판을 붙인 채 배를 깔고

검은 밭담이 꽉 차도록 엎드려 있다

 

이 짐승의 크기는 백 평 이백 평단위로 헤아린다

크지만 순해서 사납게 짖는 법이 없고

검은 밭담 우리를 넘어가는 일도 없다, 만약

밭담을 말(馬)처럼 만든다면 짐승은 초록 말로 자라고

말은 초록 갈기를 휘날리며 내 꿈속을 달리겠지

바람이 짐승의 등줄기를 맨발로 미끄러져 다닌다

바람의 발바닥에 시퍼렇게 초록물이 들었다

굽이치는 초록 물결 초록 머리채 초록 비단 춤

 

이 짐승은 일생을 돌아눕지 않는다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는 걸 보여주는 건

꼿꼿하고도 무성한 황금빛 수염이다

바람은 참빗을 들고 짐승의 수염을 곱게 빗어준다

짐승은 수염을 일제히 세우고

바람의 발바닥을 간질이며 논다

바람의 발바닥엔 그 짐승이 새긴 초록 문신이

아직 푸르게 남아 있다

 

 

수평선이라는 직업

 

수평선도 나름 바쁜 직업이다

수평선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들을 담당한다

날마다 해를 길어 올리고

달마다 달을 빚어 띄우는 일

그거 아무나 못한다

수평선이 없다면 해는 어디로 떠오르며

달은 어느 배[腹]를 빌려 둥글어지겠나

 

수평선이 아무 일 안 하는 거 같아도

그 자리 고요히 지키고 있는 것이 수평선의 주소다

내게도 그런 수평선 하나 있다면

본적(本籍)은 필요 없으리

 

너의 타는 마음을 수평선에 널어 말릴 때

수평선은 그렇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에게 기여한다

 

고깃배들 불빛이 보석 브로치처럼 밤바다에 맺혔다

 

이 배 저 배 배다른 새끼들까지 젖을 물리며

수평선은 순한 물의 짐승으로 누워 있다

만선이 될 때까지 새벽이 올 때까지

 

낯선 섬마을에서

나도 가끔 저 수평선의 무릎을 베고

잠들곤 한다

 

 

북풍

 

아무도 보지 못했네, 북풍의 검은 입을, 어디로 삼켰을까 눈 조차 없는 바람의 뱃속에서 사막이 뒤집히는 소리 짐승들 쫓기며 달리는 소리, 어제는 코끼리 떼를 잡아먹고 오늘은 산짐승을 꺾어 먹고, 저 잡식성 바람의 이빨에 끼여 울부짖는 짐승들, 세상의 배고픈 것들은 입이 없고 배만 있어,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북풍의 뱃가죽이 말라붙었네, 잠든 간판을 부숴 먹고 현수막까지 찢어먹고 그것들 내장이 덜렁덜렁 펄럭펄럭 홀러나와 만장 나부끼는 소리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내 머리 끄덩이를 잡고 끌어내려나 긴긴 밤 창문을 때리며 뒤흔드는, 작은 섬에도 북쪽이 있네, 북쪽은 크고 북쪽은 대문이 없고 아무도 없고, 무법천지네 촛불이 꺼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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