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에 / 이건청
개펄을 끌고 밀면서
왕십리쯤을, 대학 캠퍼스 인문관 쪽
가파른 계단을 오르곤 하였다
검은 염색 군복을 입은 그가 옆구리에 낀 책이
'국어학사'였던가, '현대시론'이었나,
아직 찬바람 속을
명주나비가 날아들곤 하였다. 4월이었던가,
목월 선생의 목련꽃도, 꽃 그늘 아래로
툭, 떨어져 내리곤 하였다
강의실 난간 쪽에서 바라보면
썰물의 바다, 끌고 밀며 가야할 개펄이
멈춰 있곤 하였다. 숨가쁜 개펄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힘든 개펄을 버리려고, 산등성이까지 달려갔다가
되돌아오곤 했었다
그때는, 몰랐었다
개펄이 그냥 멍에로만 있는 게 아니라
까아맣게 널려진 딱정게들이 드나들며 꿈꾸는
집이며, 백합조개들이
뻘 속에서 진주를 키우는 우주라는 것을
평생을, 깊이 빠지는 개펄을
끌고 밀면서 힘겹게 계단을
올라야 하리라는 것도 나
또한 늙은 개펄이 되어
황혼을 쓸어 담고 있으리란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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