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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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땀/정경해

에세이향기 2023. 11. 12. 08:24




 외 1편


정경해




손톱 세운 겨울바람 목을 휘감는 한신빌라 골목길
폐지 줍는 노인 등에 안개 자욱하다
저 굽은 능선에 그려지는 생의 지도枝道
밭은기침에 움푹움푹 길이 파이고
박스가 쌓일 때마다 새길이 자란다
무수한 시간을 누덕누덕 기운 오래된 등에
내일을 여는 하루가 다시 박인다
땀 줄기 깊어진 어깨에
가래처럼 달라붙은 납작한 삶이
모락모락 고개를 들고
질긴 숨줄,
한 땀 한 땀 하루를 깁는다












슬리퍼






욕실 슬리퍼 한 짝
화장실 문 닫을 때마다
빼꼼히 고개 내밀다가
번번이 한 소리 듣는다
목이 끼어 숨도 못 쉬면서
기어코 발꿈치를 붙든다
궁금한 게 뭐 그리 많냐고 윽박지르면
풀 죽어 구석에 엎드려 있다
깜깜한 화장실에 갇혀
오죽 바깥세상 그리웠을까
가벼운 몸을 들어 바로 눕히니
흠뻑 젖은 얼굴로 미안하다 웃는다
오로지 딸 걸음 소리만 기억하던
홀로된 치매 어머니 누워있다



감자 눈
 
정경해
 
감자껍질을 벗기다
싹이 돋은 감자 눈을 파낸다
귀찮은 듯 무심히 도려낸다
왠지 감자의 생각을 싹둑싹둑
자르는 것 같아 감자에게 미안하다
어두운 상자 안에서 얼마나 외로웠으면
이렇게 돋한 말을 남긴 걸까
문득, 감자를 보내주신 아버지를 떠올린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이 궁금해
어쩌다 전화를 걸면 늘 바쁘다고
단번에 말을 자르는 딸
아버지는 매몰차게 잘린 말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시골집 한구석 컴컴한 방에 누워
혼잣말로 밤을 지새운,
못다 한 그 말들이
암으로 자라난 걸까
설거지통에
뭉텅뭉텅 잘린 아버지의 말들이
감자 눈을 끌어안고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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