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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건조 살구 / 안희연

에세이향기 2023. 11. 12. 08:16

반건조 살구 / 안희연


버리러 다녀왔습니다
꼭지를 떠나려면 결심이 필요하니까요
떨어져 봐야 흙바닥인 삶이지만
아픔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요

버릴 땐 큰 것 위주로 버립니다
휑한 느낌이 좋아서요
속에 뭐가 많은 봄날이에요
나 하나로도 버겁다는 뜻입니다

이 집에 나와 간장 종지만 남은 사연입니다
누가 더 옹졸한가 겨루는 대국입니다
바둑에서는 하수가 흑을 잡는다면서요
양보합니다, 이 집엔 결국 간장 종지가 남을 거예요

그리울까요 가지 끝에 매달린
요람을 흔들어 주던 바람
밤과 나의 은밀한 결속이었던
달빛 실금들

언젠가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저를 만난다면
흙은 살살 털어 주세요
처음은 텁텁하고 떫은 법이잖아요

시간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신맛보단 단맛이 강해질 테죠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쫀득해질 거예요

위안이 있다면
받을 땐 한 다발이었던 꽃들도
죽을 땐 송이송이라는 것

알맹이 알맹이 느리게 오는 아침을 맞아요
미래요? 놓일 수 있는 식탁은 광활합니다
살구의 색감은 살구만이 낼 수 있습니다
식탁보로 속이지 않은 식탁을 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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