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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호미병원에서 / 김덕임

에세이향기 2024. 11. 4. 09:16

호미병원에서 / 김덕임

 

온몸이 벌겋다. 호미는 모루 위에서 알몸으로 두들겨 맞고 있다.

쇠망치를 든 사내의 이마는 진땀으로 번들번들하다. 그는 작은 몸이 불덩이로 변해버린 몽톡한 호미를 엎었다 뒤집었다 한풀이하듯 두들긴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강자끼리 겨루는 힘의 꼭짓점. 아니다. 닳아버린 무쇠붙이에게 수백 도의 불까지 먹여가며 마음대로 구부렸다 폈다 굴복시키는 영악스런 인간의 불 고문이다.

수원 지동 못골시장 ‘동래 대장간’, 요즘도 누가 대장간을 찾을까? 그런데 오늘 그곳을 긴하게 찾게 되었다. 자루는 깨지고 날도 무너져서 고철이 되어버린 녹슨 호미를 데리고서.

이 호미는 시어머니가 생전에 쓰던 것이다. 그때는 어머니의 갈퀴 손과 하나인 듯 경계가 없었다. 지금도 깨진 자루를 손에 쥐면 어머니의 온기가 배어나는 듯하다. 낭창하던 풀벌레 소리에도 화답하던 어머니였지만, 이 호미로 종종 살생도 저질렀다. 텃밭을 맬 때면 호미 끝에서 뭉실한 배추 애벌레의 배가 터지고, 머리가 깨지고, 초록빛 내장이 주르르 쏟아지기도 했으니, 어머니는 푸른 깃들을 괴롭히는 벌레들을 보면 공산 괴뢰군보다 더 철저하게 응징했다. 벌레들을 생매장도 아니고, 짓이겨서 존재를 완전히 무화시켰다. 호미는 어머니의 소중한 연장이며 해충을 퇴치하는 첨단 미사일이었다.

기세등등하던 무기가 세월의 녹으로 고철이 되었다. 그런데 ‘동래 대장간’을 만나 거듭났다. 그 위용을 다시 찾은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리 보인다.

시골 살림을 정리하고 올라올 때, 장독 단지 몇과 맷돌 등 어머니의 손때 묻은 몇 가지 세간을 가져왔다. 호미는 운 좋게 거기에 끼어 온 것이다. 가까스로 수원까지 왔지만, 아파트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다. 각진 신발장 서랍 속에서 주야로 자는 것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땅 맛볼 기회가 온 것이다.

낯선 텃밭의 돌멩이를 골라내다가 탈이 났다. 호미 날은 방석니처럼 무뎌지고 자루까지 금이 쩍 벌어졌지만, 오랜만에 흙을 뒤지며 물 만난 고기 같았다. 가뭄으로 단단해진 흙살을 오달지게 파고, 뿌리 깊은 바래기와 돌멩이도 척척 뒤집었다. 큰 돌멩이를 만나 콱 찍는 순간, 어머니 틀니처럼 덜겅거리던 나무 자루가 우두둑 부서졌다.

어렸을 때 고향 함평 문장 장터 말미에는 자그마한 대장간이 있었다. 친정아버지는 낫, 괭이, 삽과 쟁기 보습까지 무디어지면 장날을 기다려 그곳으로 다 데리고 갔다. 아버지를 따라간 아이들은 감쪽같이 잿빛 새 연장이 되어 돌아왔다. ‘그래, 나도 동래 대장간으로 이 아이를 데려가면 신수를 환하게 고쳐주겠지?’ 삶을 체념한 듯한 자루 깨진 호미를 신문지에 말아 들고 짬을 냈다.

요즘에 시골에서도 보기 드문 대장간이다. 재래시장 한 귀퉁이, 보통 키도 허리를 공손히 굽혀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하기야 자칫하면 불에 달구어 두들겨 맞을 판이니. 나지막한 함석지붕의 여기저기 때운 흔적이 헝겊을 덧대 기운 무명 치마 같다. 그러나 옛날 대장간의 모양새를 얼추 갖추었다. 발화 방식은 그때와 다르지만, 불잉걸 같은 화로가 있고 모루는 대장간의 좌장처럼 한가운데에 양반다리를 하고 있다. 앙바틈한 모습이 이만기 선수처럼 단단해 보인다. 그 옆에는 돌확에 물도 담겨 있다.

아저씨는 먼지 부서진 손잡이를 떼어낸다. 알몸의 호미를 벌건 조개탄 불에 넣는다. 호미는 신음 소리를 사리물고, 푸른 불꽃 위에서 숨을 죽인다. 누구도 대신 가줄 수 없는 길이다. 화구 속으로 들어가는 관을 대신할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듯이, 불 속의 호미 앞에서 나는 방관자일 뿐이다.

겉으론 안타까워하면서도 화덕 속에서 달궈지는 호미를 신기한 볼거리인 양 들여다본다. 위선자다. 불 속에 들어간 것은 자루 없는 호미인데, 내 몸이 불에 든 듯 몸서리쳐진다. 남의 극한 불행으로 인해 나의 평범한 일상에 안도하는 소인배라니….

잠시 후, 타는 노을 속에 잠겼다 나온 듯, 달궈진 호미가 집게에 물려 나온다. 아저씨는 모루 위에 벌건 호미를 올려놓고, 손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쇠망치를 쥔다. 벌거벗은 호미는 흡사 수술대 위에서 생면부지 외과 의사에게 몸도 마음도 다 맡겨버린 말기 암 환자 같다.

아저씨는 거침없이 망치를 들이댄다. 능숙한 외과 의사가 메스를 든 것처럼. 매품 팔던 흥부처럼 널브러진 호미를 간간이 집게로 집어 물두멍에 담그기도 한다. 호미는 잠시 혼절했을 뿐, 아직 살아 있노라고 ‘피지직’ 단말마를 내뱉는다. 아저씨는 얼추 두들긴 듯, 뜨거운 호미 꼬리를 매초롬하게 깎은 나무 자루에 박는다. 나무 자루는 제 속 몸을 함께 태우며 벌건 호미 꼬리를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천생연분이다.

깻잎만 한 호미 부리는 욕정으로 활활 타던 불길을 삭히고, 진한 잿빛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호미는 저어새를 닮은 갤씀한 목을 대장간 아저씨에게 공손히 숙인다. 그 마음 나도 알 것 같다. 디스크로 점점 기울어가는 나의 허리뼈도 저 화덕에 달구어 두들기면 곧추세워질까?

쇠 냄새 물씬 나는 호미를 들여다본다. 무딘 날이 잘 벼려졌다. 자루도 짱짱하나. 자루를 잡으니 손에 착 감긴다. 이 호미는 한평생 남도 땅에서 어머니와 함께했다. 어머니 치마끈에 매달려 살던 아이.

그 아이는 이제 무한의 과거를 내포한 채 용인의 자그마한 텃밭에서 나와 함께 또 한 생을 시작하려 한다. ‘심심하지 않게 또래를 붙여주자.’ 대장간 진열대 위에 줄지어 누워 있는 고만고만한 호미들 중에 한 친구를 고른다. 두 자루 나란히 신문지에 말아 쥐고 오는데, 둘은 벌써 하나가 된 듯 내내 종알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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