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목臥木/ 최경숙
나무가 기어간다. 달팽이가 더듬이를 세워 포복하듯 나무 둥치가 땅에 붙었다. 땅에 누워 몸통을 박은 뿌리는 머리를 하늘로 쳐들었고 줄기는 네댓 개 팔처럼 벌렸다. 생명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인가. 욕망이 생존의 표상으로 비친다. 생명의 끈질김. 밤낮으로 기어가는 나무의 기운이 백 년의 세월을 이겨낸다.
태어나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생명은 없다. 새도 벌레도 사람도 태어나는 곳은 물론, 자라는 곳 죽는 곳도 쉼 없이 바뀐다. 개체마다 종족마다 매번 장소가 달라진다. 하지만 나무는 한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고 같은 곳에서 죽는다. 땅에 누운 고목의 몸체를 보니 그 생각이 더욱 뚜렷해진다.
김수로 왕릉공원을 찾았다. 유년시절을 추억하며 숲속으로 들어섰다. 가락국의 번창과 영광을 상징하던 고목들이 어느덧 세대교체를 했는지 물오른 젊은 나무들이 가락국왕릉을 늠름하게 에워싸고 있다. 스무 그루 남짓한 고목들은 몸통에 둥근 혹을 달고 젊은 나무 뒤에 서 있다. 세월은 사람에게만 주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무에게도 주름을 조각하고 껍질에는 갑옷을 덧입힌다. 고목이란 단순히 격정의 세월을 보냈다고 부르는 이름이 아님을 이곳에 올 때마다 절감한다.
날씨가 흐린 탓에 어두침침하고 적막한 기운이 사방에 깔려있다. 무너진 영혼을 담아 침묵으로 누워버린 고목의 결이 새삼스레 역사의 증인으로 여겨진다. 철갑처럼 단단한 나무껍질의 문양이 해독을 원하는 문자로 보인다. 골동나이를 넘기면서 가락국의 역사를 제 몸에 새긴 충절의 문신.
젊은 나무들에게 자리를 넘겨준 고목이 부루나존자를 닮았다. 일어서고 싶다는 욕심마저 버린 와상臥狀이 거룩하고, 고목 아래 깔린 낙엽들은 오랜 수행의 시간을 일러주고 있다. 설법으로 꽃을 피웠던 숲이어서 더욱 무한한 무념의 세계랄까.
와목의 모양새가 여인의 앞섶을 풀어헤친 듯하다. 젖이 포유류 어미에게만 달린 것이 아닌가 보다. 몸통 군데군데 거무튀튀한 젖 모양의 혹이 진물을 머금은 채 붙어 있다. 갈라지고 뒤틀려 상처가 불거진 자리마다 수액이 말라 있다. 오랜 세월동안 고였다 마르기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호박돌처럼 딱딱하다. 말라 굳어진 상처에 사랑을 베풀어주었던 한 여인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밀양댁은 나의 유모였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그림자 같은 그녀는 조건 없는 사랑을 내게 쏟아부었다. 집안일을 챙기고 나를 돌보느라 밀양댁이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내가 아프면 같이 아파했고, 내가 기분이 좋으면 같이 웃어주었다. 그녀는 친자식 4남매를 혹으로 여기고 나를 친딸처럼 온갖 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밀양댁의 인생에서 성가신 혹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나를 자신의 몸으로 낳은 혈육으로 여겼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망모석이었다.
밀양댁의 남편인 박산아재는 집안 농사일을 책임졌다. 아재의 어깨 위엔 삽이 늘 얹혀 있었다. 농사철이면 양쪽 바짓가랑이 둘둘 말아 올리고 먼동이 트는 들판으로 향했다. 비틀거리며 걷는 날은 술에 취해서가 아니다. 아버지에게 자존심 상하도록 걷는 날은 술에 취해서가 아니다. 아버지에게 자존심 상하도록 야단을 맞은 때였다. 그럴 때면 땅을 기어가는 달팽이 모습 같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위로의 말로 애교를 부리면 아재는 나를 높이 안아 올려 빙글빙글 돌렸다. 아재도 나도 웃음소리에 취해 비틀거렸다. 박산아재도 밀양댁도 내겐 거친 세상살이 속의 절대적인 수호자였다.
큰 가지가 떨어진 곳에는 큰 혹이, 작은 가지에는 작은 혹이 붙어 있다. 거무죽죽한 혹의 구멍은 크기도 모양도 깊이도 제각각이다. 상처투성이일수록 나무는 당당하고 의젓하여 결기를 보여준다. 그 혹은 수백 년을 품어온 나무의 꽃이다. 어느 꽃보다 배어나는 향기가 고고하고 진실하다. 혹을 어루만져 보고 있으니 밀양댁과 박산아재의 사연들이 스며 나와 옛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나무는 뿌리의 힘으로 산다. 뿌리란 앞으로 뻗고 밑으로 내리는 힘이다. 나무가 땅에서 일어서도록 하는 뿌리의 힘은 집안과 땅을 지키는 진정한 근본이다. 그들은 당시 우리 집을 지켜주는 나무의 혹이자 뿌리였다. 비록 땅에 누운 나무처럼 미천하다 할지라도 나무를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은 뿌리가 한다. 밤낮 제 몸뚱이를 붙잡고 팔을 뻗고 다리를 내딛어 집안을 지켜주는 등불이기도 했다. 속엣것을 모조리 쏟아내어 껍질이 얇아진 와목을 지켜볼수록 내 마음도 밀랍인형처럼 쓰러진다. 누워있는 고목에서 그때 그 시절의 밀양댁과 박산아재를 다시 만난다.
왕릉 무덤가에 와목이 와불臥佛처럼 누워있다. 자연과 세월을 안은 그들이 수호신이 되어 미소를 지으며 왕릉을 지켜준다. 누워있는 것은 잠든 것이 아니라 대지의 기운을 받아들여 다른 생명을 지켜준다. 여기의 흙은 천년의 숨을 쉰다.
와불도 와목도 말이 없다. 경외감이 걷잡을 수 없이 차오른다. 보듬고 안아주는 거룩한 몸체를 지켜본다. 무언의 깨우침인가. 생각이 깊어지니 늙고 죽음이 없다는 무노사無老死를 마음 판에 새긴다.
한 가정이든 한 나라든 이름 없는 나무가 필요하다. 직립의 우람한 나무가 가정과 나라의 기둥이라면 쓰러진 나무와 누운 나무는 주춧돌이다. 주춧돌이 없는 기둥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희생과 복종과 순종을 운명으로 여기는 와목은 온몸을 뻗듯이 기어간다. 마치 사람의 발과 발가락과 발톱 같다. 밀양댁과 박산아재도 어쩌면 그때 우리 집안의 와목이 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흙과 바람과 비가 합심해서 나무를 생육시킨다. 하늘로 솟은 나무보다 땅에 몸을 댄 나무가 굴신의 소중함을 몸으로 말한다. 새봄이 오면 와목은 새싹과 새잎을 달고 혹부리 가지를 앞으로 한 뼘 더 내밀 것이다. 머리를 치켜세우고 앞으로 기어가는 나무를 통해 침묵의 인내를 새삼 돌이켜 본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석자리 / 도창회 (0) | 2024.11.06 |
---|---|
호미병원에서 / 김덕임 (0) | 2024.11.04 |
주전자 / 최장순 (1) | 2024.11.01 |
향내 품은 툇마루 / 김순경 (0) | 2024.10.31 |
따슴물에 잠기다 / 하인혜 (1) | 2024.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