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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촉 / 김애자

에세이향기 2024. 11. 13. 11:04

숨은 촉 / 김애자 

 

 

 

아침부터 굴착기가 들어와 다리 밑에 쌓인 흙을 퍼올리고 있다. 70년대 초에 새마을 사업으로 놓였던 다리를 헐어내고 다시 놓은 다리를 정비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열 푼 짜리 굿판에 떡값이 일곱 푼 격이었던 구시대의 유물이 사라지고, 철근을 촘촘히 박아가며 새로운 공법으로 소 잃기 전에 외양간 먼저 고쳐놓기 위해 벌인 공사가 시공한 지 한 달 만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지난여름 장마는 끔찍한 재난이었다. 일주일 동안 내리며 붓는 물벼락으로 곳곳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수천 평의 농지와 수십 채의 가옥이 토사에 묻혔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처럼 폐허로 변해버린 수마의 상처는 전쟁의 상흔을 연상케 하였다. 그래도 오지마을인 이곳은 몇 군데의 산사태가 난 것과, 범람하는 물살로 약간의 농지만 유실되었다.

하지만 언제 또 물벼락이 떨어질지 몰라서 마을 사람들은 마른번개만 쳐도 어마지두 겁을 먹었다. 만일의 사태로 양달말과 음달말을 잇는 다리로 골짜기에서 불어난 물이 넘치기만 하면 다리 아래에 있는 전답은 속수무책 흔적도 없이 쓸어버리고 말 터였다. 마을회관이나 그 다리는 새마을 사업이란 요란한 변죽의 울림으로 세운 것이어서 허울만 멀쩡했지 부실하기는 흥부네 집 울타리만도 못했다.

해서 이번 참에 변죽만 요란했던 구새대의 유물을 헐어내야 한다고 각단지게 맘먹고 나선 이가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남편이다. 소 잃기 전에 외양간을 먼저 고치려면 관의 눈치나 보며 부지하세월 묵새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면사무소 문턱이 닳도록 쫓아다닌 끝에 수해복구사업으로 특별예산을 받아냈다.

먼저 굴착기가 들어와 낡은 다리를 시원스레 깨부수고, 개울바닥을 파헤쳐 물배를 잡아주었다. 곧바로 다리를 놓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가판을 짜고 철근을 자르고 엮던 날은 첫추위가 대단했다. 수은주의 눈금이 영하 10도로 곤두박질 쳤으니 목덜미를 타고 들어오는 한기가 슬골까지 파고들었다. 명색이 이장댁이다보니 망치질 소리와 철근을 자르는 금속성의 파열음을 귓등으로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라면과 커피르 끓여 놓고 집으로 불러들였다. 식탁 앞에 앉은 인부들의 언 손과 마른 입술을 보자 문득 가칠장이들 모습이 떠올랐다.

오래 전, 덕주사에서 대웅전을 짓고 있을 때였다. 단청 올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아슬아슬하게 높은 작업대 판자 위에서 대들보며 서까래며 공포를 걸레로 문지르고 부레풀을 칠하던 가칠장이들의 입술도 허옇게 소금쩍이 앉았고 손은 오리발이었다. 오리발처럼 발갛게 언 손에 부레와 정분(白土)을 들고 어느 한 모서리도 빼놓을 새라 요리조리 살펴가며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그네들의 염엽한 손길이 거쳐가야만 나무가 마르면서 벌어진 틈과 옹이가 감추어지고, 채색이 곱게 먹는다. 금어들이 붓을 들고 기둥에 머리초를 올리거나, 천장에 비선문 당초문 연화문을 환하게 피워 놓은 것도 초장에 가칠장이들이 나뭇결을 매끈하게 다듬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 날 돌아오는 차안에서 ‘숨은 촉’의 의미를 되뇌었던 것은, 곱은 손으로 가칠을 하고 있는 대웅전 어딘가에 분명 촉이 끼워져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목조건물에는 못을 쓰지 않고 일일이 홈을 파고 끼워 맞추는 대신, 간혹 모서리를 돌리거나 대들보를 받치는 기둥머리 한 부분에 이에짬이 생기게 되면 그 짬에 맞게 촉을 깎아지른다. 겉에선 잘 보이지 않으나 건물의 균형을 잡아주는데는 없어선 안될 절대의 가치를 지닌 쐐기다.

남대문보수공사 때의 일화다. 건물을 해체하려고 모였으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연했다. 일을 맡은 대목이 종일토록 건물을 살피며 돌다가, 마침내 ‘여기’라고 가리킨 곳은 ‘촉’을 끼운 곳이었다. 그곳을 시점으로 목재를 하나씩 들어내면서 일련의 번호를 매겨나갔다. 보수공사를 끝낼 때에도 그 자리에 다시 촉을 질러두었다.

목공의 귀재는 새를 깎아 하늘에 띄운다고 한다. 어떤 이는 그 새를 통해 하늘과의 통신을, 어떤 이는 접신을 꿈꿀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은 부숴진 다리를 놓기 위해 정분을 바르고 문지르는 가칠장이다. 서까래 같고 대들보 같은 사람들의 위세에 가려있지만 그들이야말로 ‘숨은 촉’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슬골가지 파고드는 냉기 속에서 철근을 자르고 엮을 것이며 가판을 짜서 다리막을 세우겠는가.

올해에는, 제 위세만 믿고 경우 없이 거들먹거리는 잘난 인사들이 물러나고, 추위에 애쓴다고 인사를 건네도 소이부답(笑而不答)인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 좀 받으며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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