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짓는 집 / 염정임
아버지는 평생에 세 채의 집을 지으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마산의 언덕 동네에 지은 집은 안방과 건넌방 외에 뒷방도 있었는데, 뒷방은 방바닥에 전기 코일을 깔아 난방을 해결한 실험적인 방이었다.
연구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를 하신 셈이다. 그리고 마루가 깔린 조그만 응접실도 만드셨다.
아버지는 집짓기를 좋아햐셨다. 틈만 나면 종이에 네모를 그리고 그 옆에 다른 네모를 덧붙이며 평면도를 그리곤 하셨다. 내 방은 어디에 있어요? 하면 네모 한 칸을 옆에 붙여 그리며 여기가 너희들 공부방이야 하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듯 줄을 긋고 자우고, 다시 반듯하게 네모를 그리셨다.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얹는 날은 상량식을 한다고 떡을 하고 동네 사람들을 부르며 잔치를 벌였다. 집 짓는 터에는 언제나 큰 솥에다 아교를 끓였는데, 해초 냄새와 시멘트 냄새가 섞인 퀴퀴한 냄새가 황토 흙이 쌓인 마당에 감돌고 있었다. 대패질하는 목수 옆에는 나무 향이 그윽한 톱밥과 함께 얇게 민 나무껍질들이 쌓여갔다. 미장이 아저씨는 솜씨 좋게 시멘트를 이겨 방바닥을 평평하게 바르고, 목욕탕에는 푸른색 타일을 붙였다.
한 채의 집을 짓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담을 그릇을 만드는 것이기에 그 현장에는 기대와 희망과 풋풋한 생명감이 같이 한다. 노동이 주는 활력과 집의 얼개를 이룰 재목들이 갖고 있는 견실함을 아버지는 사랑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던 땅에서 무질서와 혼란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한 채의 덩실한 꽃으로 피는 그 아름다운 질서를 즐기신 것이리라.
집이 다 되어 이사를 하는 날, 온돌방 바닥에는 들기름 냄새가 향긋하고,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외할머니는 떡시루를 앞에 놓고, 새 집을 가져다 줄 복을 위해 두 손을 모우시곤 했다. 마루에 서기만 해도 멀리 마산 앞바다가 보이는 그 집에서 우리 형제들은 제비 둥지 속의 새끼들처럼 아버지 어머니 보호 속에서 잘도 자랐다. 아버지가 지은 둥지 속에서 우리들은 몸과 마음을 키운 것이다.
그 후 아버지는 작장을 부산으로 옮기시고 삼 년 후에 다시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아이들을 서울에 있는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서였다. 서울의 북아현동 집은 수십 개의 계단 위에 자리잡은 집이었는데, 크지는 않았지만 중정(中庭)도 있고 벽난로도 있는 멋쟁이 양옥집이었다. 꽃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사방에 장미꽃을 심고 연못을 파고 등나무 그늘도 만드셨다. 서울의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집이었다.
그때가 아버지에게는 제일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아이들이 착하고 공부도 잘해서 상급학교 입학시험에 척척 붙어 남의 부러움을 샀고, 책임을 맡은 회사의 경영도 잘 되어 국가 표창가지 받으셨다. 그 집에서 나와 동생들은 대학에 들어가고, 나는 결혼하고 친정을 떠났다.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에게는 힘이었고 돌아갈 푸근한 고향이었다.
그 이후에 아버지는 제지회사를 세워, 큰 기계를 들이고 공장도 새로 지었다. 회사는 잘 운영이 되었으나 10년이 지난 아버지의 회갑 되던 해에 부도가 나서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오일 쇼크에 따른 불경기와 새로 도입한 기계 설비가 실패의 원인이라고 하였다. 많은 정신적 고통 속에 아버지는 시골에다 다시 조그만 집을 지으셨다. 아버지는 모눈종이에 설계도를 그리고 방 두 칸과 거실이 있는 지붕이 나지막한 벽돌집을 지으셨다. 나무를 심고, 잔디를 가꾸고 텃밭을 만들며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셨다.
아침의 이슬과 저녁달을 벗삼고 이웃의 촌로들과 어울렸다. 아버지의 시골집은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색색가지의 꽃이 피고 졌다. 영산홍, 등꽃, 작약, 능소화, 그 사이를 춤추던 호랑나비들……. 우리 육 남매의 어린아이들은 방학 때면 잔디밭을 뛰어다니고 개울에서 피라미도 잡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쌓아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아버지는 노쇠하여 그 집도 유지하기가 어려워져 갔다. 결국 몇 년 전 그 집을 정리하고 집 관리가 용이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자식들은 모두 따로 둥지를 틀고 자기 새끼들 키우느라 바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년의 적막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신다.
요즈음 아버지의 유일한 소일거리는 바둑 두시는 일이다. 친구와 기원에서 만나 바둑을 두며 세월을 보내신다. 때때로 친구와 서로 바둑알을 들고 내 집, 네 집하며 다투기도 하는 것 같다. 친구와 안 만나는 날은 하루 종일 TV에서 바둑 채널을 보고 계신다. 흑색과 백색의 집들이 지어졌다 허물어졌다 하는 것을 지켜보시낟.
어느 날은 TV를 보다 소파에 앉은 채로 잠이 드신다. 아버지는 꿈속에서 집을 지으시는지도 모른다. 흰 바둑돌로 빽빽하게…….
오늘도 아버지는 TV를 켜 놓은 채 잠이 드셨다. 아마 아버지는 꿈속에서 가로 세로 열아홉 줄의 모눈 위에다 새 집을 설계하고 계실 게다. 그리고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도 올리고 목수와 미장공들을 지휘하며 아담한 집을 짓고 계실 것이다. 언젠가 아버지는 집을 짓고 나면 꼭 잘못된 곳이 한두 군데씩은 생긴다고 말씀하셨다. 아마 아버지가 꿈속에서 지으시는 집은 아무 후회가 없을 그런 집일 것이다. 아버지의 삶처럼 하려하지는 않지만, 네 귀퉁이 반듯하고 앉아도 서도 넉넉하게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그런 집일 것이다.
평생을 성실하고 겸허하게 사신 아버지! 너무 큰 집은 아버지 분에 넘친다며 언제나 자그마하고 아기자기한 집을 좋아하셨다.
아버지의 꿈속에서 우리 육 남매는 어린아이들로 돌아가 마당을 뛰어다니며 숨바꼭질을 하고 아버지의 등 뒤에 숨기도 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우리에게 따가운 세상 볕을 가려주고, 우리의 아이들 또 그 아이들에게까지 서늘한 영혼의 푸르름을 그 핏줄 속에 흘려보내리라.
아버지는 평생에 세 채의 집을 지으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마산의 언덕 동네에 지은 집은 안방과 건넌방 외에 뒷방도 있었는데, 뒷방은 방바닥에 전기 코일을 깔아 난방을 해결한 실험적인 방이었다.
연구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를 하신 셈이다. 그리고 마루가 깔린 조그만 응접실도 만드셨다.
아버지는 집짓기를 좋아햐셨다. 틈만 나면 종이에 네모를 그리고 그 옆에 다른 네모를 덧붙이며 평면도를 그리곤 하셨다. 내 방은 어디에 있어요? 하면 네모 한 칸을 옆에 붙여 그리며 여기가 너희들 공부방이야 하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듯 줄을 긋고 자우고, 다시 반듯하게 네모를 그리셨다.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얹는 날은 상량식을 한다고 떡을 하고 동네 사람들을 부르며 잔치를 벌였다. 집 짓는 터에는 언제나 큰 솥에다 아교를 끓였는데, 해초 냄새와 시멘트 냄새가 섞인 퀴퀴한 냄새가 황토 흙이 쌓인 마당에 감돌고 있었다. 대패질하는 목수 옆에는 나무 향이 그윽한 톱밥과 함께 얇게 민 나무껍질들이 쌓여갔다. 미장이 아저씨는 솜씨 좋게 시멘트를 이겨 방바닥을 평평하게 바르고, 목욕탕에는 푸른색 타일을 붙였다.
한 채의 집을 짓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담을 그릇을 만드는 것이기에 그 현장에는 기대와 희망과 풋풋한 생명감이 같이 한다. 노동이 주는 활력과 집의 얼개를 이룰 재목들이 갖고 있는 견실함을 아버지는 사랑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던 땅에서 무질서와 혼란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한 채의 덩실한 꽃으로 피는 그 아름다운 질서를 즐기신 것이리라.
집이 다 되어 이사를 하는 날, 온돌방 바닥에는 들기름 냄새가 향긋하고,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외할머니는 떡시루를 앞에 놓고, 새 집을 가져다 줄 복을 위해 두 손을 모우시곤 했다. 마루에 서기만 해도 멀리 마산 앞바다가 보이는 그 집에서 우리 형제들은 제비 둥지 속의 새끼들처럼 아버지 어머니 보호 속에서 잘도 자랐다. 아버지가 지은 둥지 속에서 우리들은 몸과 마음을 키운 것이다.
그 후 아버지는 작장을 부산으로 옮기시고 삼 년 후에 다시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아이들을 서울에 있는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서였다. 서울의 북아현동 집은 수십 개의 계단 위에 자리잡은 집이었는데, 크지는 않았지만 중정(中庭)도 있고 벽난로도 있는 멋쟁이 양옥집이었다. 꽃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사방에 장미꽃을 심고 연못을 파고 등나무 그늘도 만드셨다. 서울의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집이었다.
그때가 아버지에게는 제일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아이들이 착하고 공부도 잘해서 상급학교 입학시험에 척척 붙어 남의 부러움을 샀고, 책임을 맡은 회사의 경영도 잘 되어 국가 표창가지 받으셨다. 그 집에서 나와 동생들은 대학에 들어가고, 나는 결혼하고 친정을 떠났다.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에게는 힘이었고 돌아갈 푸근한 고향이었다.
그 이후에 아버지는 제지회사를 세워, 큰 기계를 들이고 공장도 새로 지었다. 회사는 잘 운영이 되었으나 10년이 지난 아버지의 회갑 되던 해에 부도가 나서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오일 쇼크에 따른 불경기와 새로 도입한 기계 설비가 실패의 원인이라고 하였다. 많은 정신적 고통 속에 아버지는 시골에다 다시 조그만 집을 지으셨다. 아버지는 모눈종이에 설계도를 그리고 방 두 칸과 거실이 있는 지붕이 나지막한 벽돌집을 지으셨다. 나무를 심고, 잔디를 가꾸고 텃밭을 만들며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셨다.
아침의 이슬과 저녁달을 벗삼고 이웃의 촌로들과 어울렸다. 아버지의 시골집은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색색가지의 꽃이 피고 졌다. 영산홍, 등꽃, 작약, 능소화, 그 사이를 춤추던 호랑나비들……. 우리 육 남매의 어린아이들은 방학 때면 잔디밭을 뛰어다니고 개울에서 피라미도 잡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쌓아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아버지는 노쇠하여 그 집도 유지하기가 어려워져 갔다. 결국 몇 년 전 그 집을 정리하고 집 관리가 용이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자식들은 모두 따로 둥지를 틀고 자기 새끼들 키우느라 바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년의 적막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신다.
요즈음 아버지의 유일한 소일거리는 바둑 두시는 일이다. 친구와 기원에서 만나 바둑을 두며 세월을 보내신다. 때때로 친구와 서로 바둑알을 들고 내 집, 네 집하며 다투기도 하는 것 같다. 친구와 안 만나는 날은 하루 종일 TV에서 바둑 채널을 보고 계신다. 흑색과 백색의 집들이 지어졌다 허물어졌다 하는 것을 지켜보시낟.
어느 날은 TV를 보다 소파에 앉은 채로 잠이 드신다. 아버지는 꿈속에서 집을 지으시는지도 모른다. 흰 바둑돌로 빽빽하게…….
오늘도 아버지는 TV를 켜 놓은 채 잠이 드셨다. 아마 아버지는 꿈속에서 가로 세로 열아홉 줄의 모눈 위에다 새 집을 설계하고 계실 게다. 그리고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도 올리고 목수와 미장공들을 지휘하며 아담한 집을 짓고 계실 것이다. 언젠가 아버지는 집을 짓고 나면 꼭 잘못된 곳이 한두 군데씩은 생긴다고 말씀하셨다. 아마 아버지가 꿈속에서 지으시는 집은 아무 후회가 없을 그런 집일 것이다. 아버지의 삶처럼 하려하지는 않지만, 네 귀퉁이 반듯하고 앉아도 서도 넉넉하게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그런 집일 것이다.
평생을 성실하고 겸허하게 사신 아버지! 너무 큰 집은 아버지 분에 넘친다며 언제나 자그마하고 아기자기한 집을 좋아하셨다.
아버지의 꿈속에서 우리 육 남매는 어린아이들로 돌아가 마당을 뛰어다니며 숨바꼭질을 하고 아버지의 등 뒤에 숨기도 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우리에게 따가운 세상 볕을 가려주고, 우리의 아이들 또 그 아이들에게까지 서늘한 영혼의 푸르름을 그 핏줄 속에 흘려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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