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콩 이야기 / 문갑순
나는 콩입니다. 콩깍지 속에서 형제자매들과 꼭 붙어 앉아 '콩콩콩'하고 내 이름을 불러 봅니다. 촌스러운 듯 하면서도 참 다정한 이름입니다. 나는 순수한 보라색 꽃을 피우고 가을이 깊어 가면 깍지 속에서 동그란 모양새를 가다듬습니다. 하도 오래되어 내가 어디서 이 한반도까지 오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나의 DNA를 추적해 보면 아득한 옛날 오륙천 년 전 드넓은 만주 벌판이 아스라이 기억납니다. 본디 나는 이렇게 통통하고 탐스러운 모양새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기름진 토양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태양빛을 마음껏 받으며 나는 나대로의 삶의 찬가를 불렀지요. 그때 나와 함께 그 지역에 살던 백의민족, 선량하고 현명하던 그 백의민족은 나를 발견한 기쁨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고 나는 사랑에 보답하고자 점점 굵은 열매로 결실을 맺었답니다. 나는 더 열심히 결구하기 위해 공기 속의 질소를 모으는 박테리아를 유혹하여 내 뿌리에 가두었지요.
저 중국의 광대한 민족이 알아채기도 전에 하늘의 계시를 받고 그 땅에 살았던 백의민족은 하늘의 아들딸답게 대번에 나의 가치를 알게 되었지요. 그들은 나를 띄워 그 이름도 찬란한 두장 문화를 꽃피웠답니다. 나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내 몸을 내어 주었답니다. 삶아지고 빻이고 못생긴 덩어리로 빚어져 어두컴컴한 곳을 지나고 소금물 속에서의 간고를 겪어 마침내 된장, 간장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못생긴 것을 형용할 때 옥떨메니 어쩌니 하며 나를 빗대었지만 나는 잠자코 부서지고 쪼개져서 지상의 맛 글루타민산이 되었지요. 이것이 나의 오래 참음과 희생정신과 고결한 성품 탓이라고 할 수 밖에 없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알아주든 말든 그저 사람들의 식생활의 근간을 차지하게 된 것만으로도 흡족해하며 지금까지 내 몸을 기꺼이 바치고 있습니다.
신라 왕의 폐백 품목에 내가 들어 있었던 것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고 저 유명한 공자도 장이 없으면 먹지를 않는다고 하였고 사치스러움의 극치로 묘사되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식탁 위에도 내가 앉아 마리 앙뜨와네뜨의 아름다운 자태도 볼 수 있었으니 이만하면 내 몸을 바친 희생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겠지요.
꼬투리 안에서 우리는 정답게 대화를 나눕니다. 잘 영글어 각자 무엇이 될 거냐고, 좀 멋을 아는 한 자매는 바이오연료가 되어 몸값을 올리고 싶다고 합니다. 저 끝에 자리한 형제는 우주정거장에 심어지는 먼 미래를 끔 꾸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우리의 선조들이 자의반 타의반 유럽으로 미 대륙으로 흩어져서 콩기름이 되고 의약품이 되고 심지어 자동차 연료가 되었으니까요. 꼬투리 속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우리의 이야기들이 들립니까? 어떤 식물학자들은 우리들의 대화를 알아들으려고 주의를 기다린다지요. 우린 우리의 미래에 대한 꿈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여전히 한민족과 함께 이 땅에 살고 싶습니다. 나는 내 박테리아로 인해 녹비로 사용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자동차에 끌꺽꿀꺽 삼키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하늘의 아들딸인 이 민족과 함께 살아온 세월을 지금도 사랑합니다. 아니 이 민족이 나를 여전히 가장 귀하게 대접해주는 그 마음을 사랑합니다. 이 민족은 나를 귀히 여깁니다. 어디서 이런 사랑을 받을까요? 이들은 된장, 청국장찌개로 나날의 식탁에 나를 올립니다. 나는 두부도 되고 콩나물도 되어 서민 가정의 식탁을 어루만집니다. 이 민족은 나와 함께 놀라운 역사를 만들더니 지금은 한류가 되어 세계인의 가슴에 별로 새겨지고 있습니다. 이 현명한 사람들은 심지어 나를 넣은 콩밥으로 죄수들의 식사를 삼으니 그 지혜와 인류 사랑의 높은 철학에 배시시 웃음이 나옵니다. 나는 행복한 콩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새로운 영양성과 기능성을 발견하였다고 호들갑을 떨어댑니다. 그러나 나는 원래 그런 작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온갖 소동과 변덕에 개의치 않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서구에서 몰려온 햄버거와 콜라에 빠져 나의 가치를 잊어가고 있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며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스러지는 온갖 일들에 나는 초연합니다. 나는 오천년을 이 민족과 함께 있을 뿐입니다. 이런 나의 의연하고도 무심한 마음을 살포시 감동시키는 사건이 진행되고 있으니 마음 밑자락의 감동을 숨기가 힘이 드는 군요. 나를 위한 박물관을 경북 영주에 세운다고 하는군요. 영주가 아닌들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영주는 아름다운 곳이기에 더욱 나의 마음이 설렙니다. 영주 부석사 아래 사과향기 날리는 아름다운 그곳에 나를 기념하는 터전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한없이 펼쳐지는 들판을 내다볼 때 그 자리에 콩 박물관이 있을 것입니다. 한민족과 함께한 내가 거기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나는 행복한 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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