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독, 그 어느 날의 기억 / 허정진
물 항아리에는 오래된 풍경이 세 들어 산다.
고향 옛집 낡은 공간마다 침묵 속에는 유년의 굴풋한 그리움이 흑백의 시간으로 숨어있다. 식구들 모여앉아 두리반을 펼치던 대청마루, 댓돌 아래 내려서면 아침 빗질 자국 선명한 마당이 있고 아래채에는 뒷간이 딸린 돼지우리가 있었다. 나지막한 돌담에는 호박넝쿨이 여름햇볕 아래 바지런히 기어오르고, 밤이면 빗살무늬로 쌓이는 달빛에 식구들 웃음이 휘영청 계절마다 익어갔다. 부엌은 안방과 대청마루를 끼고 집안 깊숙이 들어앉아 있었다.
커다란 정지 문을 삐거덕 열고 들어서면 부엌은 동면에 든 굴속처럼 어두컴컴했다. 문틈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이 없었다면 비밀요새에 숨어있는 것 같았다. 반질반질한 가마솥과 부뚜막 아래에는 시커먼 아궁이가 크게 입 벌리고 부지깽이가 굴러다녔다. 날단거리나 물거리, 시초나 낙엽 구하기도 힘들어 삭정이나 싸리나무, 청솔 가지 않은 하루치 땔거리들이 옹색하게 뒤편에 자리 잡았다. 위아래 널을 둔 죽편 살강 위에는 식구들 숫자 남짓한 사발이나 뚝배기 같은 식기들이 엎드려 숨을 죽였다.
그 부엌문 쪽에 물 항아리가 수도승처럼 오도카니 자리 잡고 있었다. 어른 허리춤 높이의 둥글게 살진 옹기물독이었다. 안을 들여다보면 목까지 찬 물이 찰랑거리고 자그만 종굴박 하나가 항로 없는 나룻배처럼 떠다녔다. 일렁이는 잔물결에 새털구름이 들랑거리고 까치 울어대는 아침이면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야음을 틈타 가끔은 길 잃은 새끼거미가 깨금발로 허공을 지나다닌다는 소문도 들렸다.
순정 녹아든 물빛 수채화처럼 맑고 고운 샘물이었다. 상쾌하고 달달하여 이보다 명징한 물맛은 또 없었다. 밥물이 되고 된장찌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허기진 식구들의 음료수이고 주전부리였다. 긴 밤을 지새우는 식구들 머리맡에 자리끼였다가 어둑새벽 장독대 정화수가 되고, 배꼽마당 신나게 뛰어놀다 한 바가지 들이키면 정말 꿀맛이었다.
집안에 불씨가 꺼뜨려지는 일이 없듯 항아리 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독에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은 아녀자 몫이었다. 호락질로 짓는 몇 뙈기 농사에 부잣집처럼 물아범을 둘 수도 없는 일이고, 아낙네들 사랑방 같은 동네 우물가에 볼썽사납게 남정네들이 들락거릴 형편도 못되었다. 손대기할 만한 딸이라도 있어 몇 바가지라도 도와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무거운 삶의 동이를 뼛심으로 홀로 채워낸 사람은 어머니였다. 새벽빛 푸른 얼굴로 샘물을 길어 올려 머리 위 똬리에 천형 같은 무게를 평생 이고 날랐다. 이마와 목덜미는 흘러내린 물과 땀으로 축축했다. 밤낮이 따로 없고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따로 없었다. 산천초목이 가물어도, 천하강토가 얼어붙어도 어머니의 물독은 한 번도 마르지 않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세월에도 흔들림 없는 수행자 같았다. 물독은 생떼 같은 목숨 끌어안은 어머니의 작은 호수였다.
태초의 근원처럼 신비롭고 위대한 그 호수는 살아 출렁이는 신화들로 가득 찼다. 귀를 기울이면 밤새 옹달샘들이 보글보글 내일의 꿈을 잉태하는 소리가 들렸다. 맑고 고운 꿈들은 밤마다 항아리 벽 숨구멍을 찾아 쉼 없이 허물을 벗었다. 한여름 물줄기의 해갈이 있어 꽃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물독은 집안에 없어서는 안될 생명수와 마찬가지였다. 결과 겹으로 층층한 푸른 세포 키워내는 물관처럼 어머니의 물독은 생生의 자궁이며, 둥지이며, 세상으로 향한 출구였다.
그 물독에 '채움'의 과정이 어머니에게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었을 것이다. 비워지면 채워야한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넙죽넙죽 밥숟갈을 받아먹는 어린 자식을 보듯 모자라면 또 채워 넣는 화수분 같은 사랑이었으리라. 가족에 대한 사랑에 '비움'이란 애초부터 없었다.
세상은 목마름과 메마름의 연속이었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고 하고 있는 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날도 많았다. 전전반측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날들, 전전긍긍하며 속을 태우는 날들이면 어머니의 청정한 물 항아리처럼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세상살이가 힘에 부딪칠 때마다 먼 산을 보며 물 한 바가지 벌컥벌컥 들이키던 아버지의 시름과 고난을 새삼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는 연약하지만 사랑에는 강한 법이다. 어깨까지 젖는 고된 날들이었지만 분신 같은 가족이 있어 삶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이 절대 절명처럼 요구되던 시절, 그런 어머니 품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어쩌면 가난 속에서도 축복받은 세대가 아닌지 모르겠다. 비록 부족하고 불편했지만 결코 불행하거나 결핍하지도 않았던 그 시절을 돌아보면 과연 행복이란 것을 질과 양으로만 따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큰 가슴을 가진 그 호수는 헐거운 어미의 눈으로 세상을 다 품어 안았다. 어머니의 물 항아리가 목숨 줄이 되어 자식들은 세상에 당당히 입성하여 성공하고 출세도 하였다. 자식들이 모두 떠난 자리, 홀로 남은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물독에 물을 채우지 않는다. 다만 그 항아리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만 가득 차 있다.
물 항아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마음속에 정물화로 남아 있다. 텅 빈 항아리 등뼈 사이를 빠져나온 바람이 행여 자식들 목마르지 않을까, 오늘도 생의 행간을 다독이며 지나간다. 암호처럼 손때 묻은 그리움을 필사하는 시간마다 제 살 내준 조각달 물낯으로 내려앉는다. 멀리서 노잣돈 같은 뻐꾸기 울음 들려오고 오래된 어머니가 복사꽃마냥 환하게 피어난다.
커다란 정지 문을 삐거덕 열고 들어서면 부엌은 동면에 든 굴속처럼 어두컴컴했다. 문틈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이 없었다면 비밀요새에 숨어있는 것 같았다. 반질반질한 가마솥과 부뚜막 아래에는 시커먼 아궁이가 크게 입 벌리고 부지깽이가 굴러다녔다. 날단거리나 물거리, 시초나 낙엽 구하기도 힘들어 삭정이나 싸리나무, 청솔 가지 않은 하루치 땔거리들이 옹색하게 뒤편에 자리 잡았다. 위아래 널을 둔 죽편 살강 위에는 식구들 숫자 남짓한 사발이나 뚝배기 같은 식기들이 엎드려 숨을 죽였다.
그 부엌문 쪽에 물 항아리가 수도승처럼 오도카니 자리 잡고 있었다. 어른 허리춤 높이의 둥글게 살진 옹기물독이었다. 안을 들여다보면 목까지 찬 물이 찰랑거리고 자그만 종굴박 하나가 항로 없는 나룻배처럼 떠다녔다. 일렁이는 잔물결에 새털구름이 들랑거리고 까치 울어대는 아침이면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야음을 틈타 가끔은 길 잃은 새끼거미가 깨금발로 허공을 지나다닌다는 소문도 들렸다.
순정 녹아든 물빛 수채화처럼 맑고 고운 샘물이었다. 상쾌하고 달달하여 이보다 명징한 물맛은 또 없었다. 밥물이 되고 된장찌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허기진 식구들의 음료수이고 주전부리였다. 긴 밤을 지새우는 식구들 머리맡에 자리끼였다가 어둑새벽 장독대 정화수가 되고, 배꼽마당 신나게 뛰어놀다 한 바가지 들이키면 정말 꿀맛이었다.
집안에 불씨가 꺼뜨려지는 일이 없듯 항아리 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독에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은 아녀자 몫이었다. 호락질로 짓는 몇 뙈기 농사에 부잣집처럼 물아범을 둘 수도 없는 일이고, 아낙네들 사랑방 같은 동네 우물가에 볼썽사납게 남정네들이 들락거릴 형편도 못되었다. 손대기할 만한 딸이라도 있어 몇 바가지라도 도와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무거운 삶의 동이를 뼛심으로 홀로 채워낸 사람은 어머니였다. 새벽빛 푸른 얼굴로 샘물을 길어 올려 머리 위 똬리에 천형 같은 무게를 평생 이고 날랐다. 이마와 목덜미는 흘러내린 물과 땀으로 축축했다. 밤낮이 따로 없고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따로 없었다. 산천초목이 가물어도, 천하강토가 얼어붙어도 어머니의 물독은 한 번도 마르지 않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세월에도 흔들림 없는 수행자 같았다. 물독은 생떼 같은 목숨 끌어안은 어머니의 작은 호수였다.
태초의 근원처럼 신비롭고 위대한 그 호수는 살아 출렁이는 신화들로 가득 찼다. 귀를 기울이면 밤새 옹달샘들이 보글보글 내일의 꿈을 잉태하는 소리가 들렸다. 맑고 고운 꿈들은 밤마다 항아리 벽 숨구멍을 찾아 쉼 없이 허물을 벗었다. 한여름 물줄기의 해갈이 있어 꽃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물독은 집안에 없어서는 안될 생명수와 마찬가지였다. 결과 겹으로 층층한 푸른 세포 키워내는 물관처럼 어머니의 물독은 생生의 자궁이며, 둥지이며, 세상으로 향한 출구였다.
그 물독에 '채움'의 과정이 어머니에게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었을 것이다. 비워지면 채워야한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넙죽넙죽 밥숟갈을 받아먹는 어린 자식을 보듯 모자라면 또 채워 넣는 화수분 같은 사랑이었으리라. 가족에 대한 사랑에 '비움'이란 애초부터 없었다.
세상은 목마름과 메마름의 연속이었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고 하고 있는 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날도 많았다. 전전반측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날들, 전전긍긍하며 속을 태우는 날들이면 어머니의 청정한 물 항아리처럼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세상살이가 힘에 부딪칠 때마다 먼 산을 보며 물 한 바가지 벌컥벌컥 들이키던 아버지의 시름과 고난을 새삼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는 연약하지만 사랑에는 강한 법이다. 어깨까지 젖는 고된 날들이었지만 분신 같은 가족이 있어 삶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이 절대 절명처럼 요구되던 시절, 그런 어머니 품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어쩌면 가난 속에서도 축복받은 세대가 아닌지 모르겠다. 비록 부족하고 불편했지만 결코 불행하거나 결핍하지도 않았던 그 시절을 돌아보면 과연 행복이란 것을 질과 양으로만 따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큰 가슴을 가진 그 호수는 헐거운 어미의 눈으로 세상을 다 품어 안았다. 어머니의 물 항아리가 목숨 줄이 되어 자식들은 세상에 당당히 입성하여 성공하고 출세도 하였다. 자식들이 모두 떠난 자리, 홀로 남은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물독에 물을 채우지 않는다. 다만 그 항아리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만 가득 차 있다.
물 항아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마음속에 정물화로 남아 있다. 텅 빈 항아리 등뼈 사이를 빠져나온 바람이 행여 자식들 목마르지 않을까, 오늘도 생의 행간을 다독이며 지나간다. 암호처럼 손때 묻은 그리움을 필사하는 시간마다 제 살 내준 조각달 물낯으로 내려앉는다. 멀리서 노잣돈 같은 뻐꾸기 울음 들려오고 오래된 어머니가 복사꽃마냥 환하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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