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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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말(馬) / 박시윤

에세이향기 2021. 8. 17. 12:19

말(馬) / 박시윤
     
    



말이 달린다. 굽 소리가 사위를 가른다. 장엄하게 뻗어 나가는 소리, 지하 깊숙이 매몰된 거대한 말굽의 역사를 깨우기라도 하듯, 사방에서 지각변동 같은 파장이 꿈틀댄다. 말이 달린다. 얼어붙은 개울을 건너, 빈 들을 지나, 사막을 넘어, 광야를 찾아 쉼없이 달린다. 모래바람 동공을 찌르고, 가시가 몸통에 박히고, 냉기 품은 파편이 꽂혀도 말은 달린다. 닳아빠진 관절 깊숙이 시큰한 통증이 움을 틀어도 말은 멈추지 않는다.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아파하지 않으리라. 그것만이 내가 살 길이리라.
은백색의 갈기가 바람에 휘날린다. 무릎의 마디가 꺾이고 펴질 때마다, 굽소리가 우렁차게 대지를 울린다. 대륙의 저 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광야를 목마르게 찾아 떠돌았던 태초의 땀 냄새가 난다. 닳아빠진 굽 사이로 오래된 상처가 곰삭고 있다. 편자 따위는 근험한 나라님들이나 맛보시리라. 아직은 쓸 만한 굽이라고 두다리 번쩍 들어 '쿵쿵- 바닥을 담금질한다. 가라앉았던 흙먼지들이 굽을 따라 보얗게 일어난다. 말굽에 휘감기며 창공으로 웅장하게 피어오르는 먼지, 흩어지는 먼지의 흐름에는 뿌리 깊은 야생의 본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더 빨리, 더 빨리…. 대륙의 먼지를 폐 깊숙이 넣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용맹스러운 심장박동 소리가 아직도 살아남아 대를 잇고 잇는다. 말이 달릴 때, 문맹의 대지 위에 문명의 길이 열리고, 역사의 꽃이 실크로드로 피어났다.
한 무리의 말들이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는다. 푸른 초원, 평화로운 풍경이다. 언 땅에서 가까스로 움을 틔운 풀의 향기를 말은 본능으로 알아챈다. 콧구멍을 씰룩이며 혀를 말아 뜯어 올린 풀을 씹을 때마다 미세하게 초록의 향이 풍긴다. 이따금씩 뿌리에 묻어온 흙들이 이빨에 어기적거리며 목으로 넘어간다. 대륙에서 맛보았던 황무지의 느낌처럼, 건조하고 까끌거리며 목구멍을 자극한다. 풋풋하게 말의 입속을 맴돌다 후각을 자극하며 날숨을 따라 튕겨 나온 잡풀 냄새가 허공을 맴돈다. 무리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혀끝에 말려들 때면 나는 식욕이 왕성하던 초식의 본능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신다. 콧속을 누비는 말의 냄새에서 광야의 질기고도 질긴 생명력의 냄새가 난다.
후광을 타고 한 마리의 말이 시야에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굴곡진 등 선 마루를 타고 햇살이 꼬리 끝까지 미끄러져 내린다. 빛에 반사되어 은백색의 아지랑이로 가물거린다. 눈이 부시다. 말의 움직임은 흘러넘치는 꿈결처럼 천상을 드나들며 아우라를 자아낸다. 기름져 빛을 반사하는 자태에 눈이 멀 것만 같다. 꼿꼿이 쳐든 머리, 쫑긋한 두 귀, 흡수한 빛을 반짝거리며 튕겨내는 갈기, 산 능선처럼 자연스럽게 굴곡이 진 등과 허리, 차분히 흘러내린 꼬리가 언뜻 보아도 예사롭지 않다. 저놈은 분명 좋은 혈통을 이어받았으리라.
말은 미동도 하지 않고 먼 곳을 주시한다. 대륙 정복을 꿈꾸며 끊임없이 나아가던 장군들의 모습과 닮았다. 앞으로 가로막힌 산,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시끌벅적하게 요동치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사위의 소리, 말은 지금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까.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전쟁판에서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고 있을까. 아니면 무리를 데리고 이 우리를 뚫고 자신들의 애끓는 땅으로 달려 나갈 계략이라도 꾀는 것일까.
살아남기 위해서 길들여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게라도 살아 남아 마지막까지 종족을 지키며 혈통을 이어야 했으리라. 재갈을 물고 말갖춤을 하고 본능을 누르며 고삐에 이끌려야만 했으리라.
말은 앞발로 쿵쿵 바닥을 찧더니 이내 코를 처박고 콧구멍을 씰룩이며 냄새를 맡는다. 한참을 그러더니 좌우로 수차례 머리를 흔든다. 바람의 오고 감 속에 나는 한참이나 우리 밖에 쪼그리고 앉아 말을 바라본다 . '쿵-쿵-쿵-' 말은 끊임없이 바닥을 담금질한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나는 이끌리듯 우리 안으로 걸어가 바람에 갈기를 휘날리는 녀석 앞에 선다. 무리를 벗어난 녀석은 목을 길게 빼고 내게 머리를 밀어 냄새를 맡는다. 어깨선을 넘어 목덜미를 지나, 갈기 같은 내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귓가에서 녀석의 움직임이 멈춘다. 습한 콧김이 귓속을 파고든다. 온몸에 미묘한 소름이 돋는다. 심장 소리가 가슴을 뚫고 천지로 요동친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숨소리를 가다듬는다.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본다. 습하고 웅숭깊은 숨소리가 다시 나의 얼굴을 지나 귓속을 파고든다. 그르렁대며 뼛속 깊은 골짜기까지 파고드는 숨소리가 까마득히 먼 영혼의 고향에 얼어붙어 있는 내 본능을 녹이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녀석의 볼을 천천히 어루만지다가 나의 목덜미 깊숙이 녀석의 볼을 갖다 댄다.
웅숭대며 흘러가는 녀석의 혈통이 따스하게 미끄러져 온다. 녀석의 조상들 무리에서 전해졌을 거대한 말굽의 움직임이 내 심장으로 파고든다. 사포 같던 죽음의 대지에 길이 열리고, 역사의 꽃이 붉게 피던 날, 승리의 깃발이 천지에 꽂혔으리라. 장수들의 우렁찬 군대가 승리의 함성을 지르던 날, 용맹스럽게 달려가던 말굽의 역사는 바람처럼 대지 곳곳에 내려앉아 사라졌으리라. 대륙의 먼지들은 수백 년을 일어나고 가라앉기를 반복했을 것이고, 말굽의 역사는 인간의 승리에 그렇게 고요하게 잊혔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영겁의 세월 동안 거칠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황무지 땅에 족적을 남기며, 석양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면서도 말의 웅혼한 질주는 끝을 몰랐을 게다. 인간은 이 땅에 인간의 역사를 기록했고, 저들의 역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람에 씻어 보냈을 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선 강한 햇살이 무참하게 쏟아졌다. 적군과 아군의 극단적 혼돈이 지배하던 영토 위에, 습하고 거친 숨을 가까스로 토해내던 말들이 있었다. 촘촘하게 박아놓은 마갑의 무게를 견디며 짓무른 제 살점의 썩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하루가 다르게 닳아가는 굽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달렸다. 광야의 땅을 향해 돌격을 외치던 장수들의 무게를 감당하며 지칠 줄 모르고 달렸다. 끝없이 끝없이 달리다 보면 어깻죽지에서 불쑥 페가수스의 날개가 돋아 지상으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너울대는 새하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끝없이 비상하는 천마의 모습으로도 탈바꿈하고 싶었다.
그랬다. 나는 한 마리의 말처럼 숨이 멎도록 질주했다. 아무도 다다르지 못한 광야를 찾겠노라, 미친 듯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다. 현실의 혼란이 무겁게 짓누를 즈음, 편자를 신은 발바닥이 아렸다. 어디로든 달리고 싶어다. 눌러야만 했던 내 속의 본능을 바닥까지 끄집어내 숨이 멎도록 달려 나가고 싶었다. 이상의 나래를 이해하지 못한 주변의 시선을 겪을 때마다 어두운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더욱 깊숙이 가라앉는 연습을 해야만 했다. 현실을 살기 위해 아우성 쳐대는 전쟁판의 아수라장이었으며, 날마다 숨이 막혔다. 광야를 누비고 싶은 본성을 누를 때마다 혹독하게 몸살을 앓았다. 현실은 날것으로 꿈틀대는 생각들을 더욱 땅속 깊숙이 매몰하려 들었다. 나는 스스로 자멸해야 했고, 죽은 척, 잉여의 시간을 살아야 했다.
말들의 질주는 가미되지 않은 날것의 움직임이다. 목마른 아우성이 스며 있는 날것의 소리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날아오르는 날 것의 질주 속에 숨통을 죄여오는 고통은 아직도 꿈틀댄다.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는 미지의 광야를 향해 멈출 수 없는 질주였다. 죽음의 전쟁판에서도 박차를 가하며 지편선을 달려, 거칠고 메마르고 황량한 대륙을 건너 광활한 초원, 자유의 땅으로 비상을 꿈꾸는 한 마리 말의 거침없는 질주를 보며 나는, 꾹꾹 눌러 놓아야만 했던 야성의 본능을 깨워 오늘도 밤을 새운다.
어쩌면 나도 광야를 찾아 끝없이 질주하다 보면 끝내는 어깻죽지 뼈에서 커다란 날개가 돋을지도 모르리라.아- 그때는,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안고 훠얼 훨 창공을 날아올라 그리도 찾아 헤매던 광활한 초원, 자유의 땅으로 날아가리라.
젊은 백색의 인격이 순결하게 너울대던 꿈들을 데려와 마음껏 달려가리라. 그곳이 어디이든 상관없다. 성난 갈기털을 휘날리며 하늘로 끝없이 승천하는 천마도의 말馬처럼 창공으로 치솟고 싶다. 어지러운 지상의 허무를 박차고 가벼이 날아오르는 날, 나는 지평선의 곡선을 따라 수십만 개의 징검다리를 건너리라. 광야를 향해 끝없이 내달렸던 말굽의 역사가 깊은 바다를 건너 마지막 대륙에 도달하는 날, 나는 나를 결박하고 있는 모든 허무를 깨어버리고 얼어붙은 꿈을 깨워 마음껏 비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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