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이 말한다 / 김원순
그 집은 또 하나의 견고한 성(城)이었다. 바람과 구름조차 비켜가는 집. 잿빛 하늘이 바위처럼 누르는 날이면 성 안은 우물보다 깊은 침묵의 늪속으로 한없이 빠져들곤 했다. 온갖 새들이 그 성을 무시도 넘나들지만 굳게 닫힌 대문은 더욱 견고하게 빗장을 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성 안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과연 살고 있기나 하는 걸까 몹시도 궁금했다. 단 한 번도 가슴을 활짝 열고 우물보다 깊은 침묵의 정원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색색의 타올이 가끔 옥상의 빨랫줄에서 해바라기 하는 걸 보긴 했다. 움츠렸던 몸을 펴고 긴 기지개를 켜는 듯, 불면으로 뒤척이던 밤을 툭툭 털어내는 듯 바람에게 몸을 맡기는 타올에서 한웅큼의 체온을 읽기도 했다. 때로는 색색의 타올처럼 갖가지 생각과 행동들이 관습의 구멍을 넘나들며 거미줄처럼 하루를 담담히 엮어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자 바람에 휘날리던 타올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성 안엔 타올보다 부드럽고 포근한 사람이 살고 있노라고. 휘날리는 타올이 마치 무언의 항변이자 존재의 징표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굳게 닫힌 대문을 활짝 열어주고 싶었다. 지천으로 흩날리는 봄 햇살을 쓸어 모아 주고 싶었다. 그러면 세상의 온갖 소리와 소문들로 닫혀버린 마음의 빗장도 스르르 열릴 것 같아서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여 마치 망망대해에 떠있는 고도(孤島)같은 대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마음이란 낡은 가구로 가득찬 방과 같아서, 바깥의 새로운 풍경을 들여놓으려면 낡은 가구를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는 걸 일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무엇으로도 열 수 없던 대문의 위력 앞에서, 나도 저런 대문을 한 번쯤 가져봤으면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들었다. 바람이 말처럼 달리는 넓은 정원, 줄장미가 우거진 우아한 담장, 온갖 수목들이 자태를 뽐내며 키 재기를 하는……. 아, 이런 정원을 품고 있는 대문 앞에 내 이름이 새겨진 하얀 대리석 문패를 훈장처럼 내걸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곧 후회했다. 나의 열등감과 이기심, 아집과 자만이 만들어낸 우매함과 무지함 때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굳게 닫힌 대문을 보자 삼십 년 전 열 한 가구 살던 집의 대문이 문득 떠올랐다. 낡은 초록 대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으며 새벽이 되어도 닫힐 줄 몰랐다. 순한 바람에도 곧잘 덜커덩되었지만 아프다고 드러눕는 법 없이 버티고 서서 그 많은 사람들을 배웅하거나 마중을 나가곤 했다.
툇마루에 앉아 운동화 밑창에 본드를 바르는 날이면 대문은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한 짝 붙이면 8원이라도 받으니 얼마나 희망적인가. 어린 것들의 배를 채워주는 유일한 것이니 시린 손을 호호 불더라도 그 손길을 멈추지 말라고. 그 손길을 따라가면 작은 대문이 달린 집 한 채 담담히 기다리며 있을 거라고. 낡은 대문의 말씀 때문에 유난히 따뜻했던 그 해 겨울이었다. 큰 아이도 ‘ㅅ'초등학교 오학년 때의 그 낡은 대문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전학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학급 임원이 되더니, 제 생일날 반 아이들을 두 줄로 세워선 다윗처럼 당당하게 대문을 들어서던 가을날의 깊고 붉은 오후를. 초등학교 육 년 동안 네 번의 전학으로 수없이 만나고 헤어졌던 교문이 단호하게 일러주던 화인(火印)같은 말씀들을. 때론 육중한 교문처럼, 때론 낡았지만 당당한 대문처럼 서서 자신을 믿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전진하는 모습이 지금의 아담한 대문을 갖게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곤 한다. 아이에게 있어 대문은 세상을 들여다보는 볼록렌즈며 세상의 소리를 듣는 청진기가 아닐까.
대문은 열리기 위해 존재한다. 열리지 않는 대문은 대문이 아니라 벽일 터이다. 창이 바깥 풍경을 보고 느끼는 눈과 코라면, 대문은 세상과의 소통과 타협, 대화와 기다림, 때로는 비밀과 평정, 휴식을 대변해 주는 입과 귀라는 생각이 든다. 닫힌 대문은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단호한 몸짓이며, 열린 대문은 그 모두를 반긴다는 환영의 깃발이다.
대문을 여는 중요한 열쇠는 집주인의 온전한 마음이다. 그래서 집주인이 곧 대문일 수도 있다. 대문은 또 다른 승낙이자 거절이며 단절이자 아우름이다. 대문을 거쳐야지 그 집의 심장인 현관에 비로소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과 딸도 대문을 활짝 열고는 나비처럼 날아가 버렸다. 제 둥지를 찾아 떠나가던 날, 대문은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담아 오래도록 바라보며 서있었다. 귀여운 손자 손녀를 처음 만나던 날도 대문은 나보다 먼저 달려가 반갑게 맞이하지 않던가. 그리운 아버지도 조용히 대문을 열고 먼 하늘여행을 떠나셨고, 유일한 피붙이 조카 또한 대문을 나서더니 지금껏 돌아오지 않고 있다. 수많은 인연을 만나고 떠나보낸 대문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의 대문을 생각해 본다. 이 대문을 통해 맞이한 것은 무엇이며 떠나보낸 것은 또 얼마인가. 살아오면서 어떤 대문으로 살았길래 아직도 삐거덕거리는 것일까. 내 마음의 대문이 닫혔을 때 수많은 이의 가슴에 미움과 분노의 분진이 일었을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삐거덕이는 대문 뒤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다가가 마음의 빗장을 열어주고 싶은 데 마음만 바장일 뿐 몸은 요지부동이다.
대문은 그 집의 쉼표다. 누구든 찾아오면 대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대문을 두드린다. 대문이 응답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찾아온 손님이 누군지 눈과 귀로 들은 뒤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대문이 정중히 승낙할 때까지 손님은 그저 하나의 쉼표일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대문은 기다림으로 우리를 길들이는 듯하다. 갑자기 대문이 자동차의 브레이크라는 생각이 든다.
대문을 나설 땐 집안을 두루 살핀 뒤 조심스럽게 닫는다. 줄곧 말없음표로 서 있었지만 닫는 순간 대문은 마침표가 된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눈과 귀를 모아서 집을 지킨다.
대나무의 마디같은 대문은 휴식의 또 다른 이름이다. 묵묵히 서있다고 해서 결코 게으른 것은 아니다. 대문 안팎에서 나는 소리들을 걸러내는 거름망이자 집의 품위를 결정짓는 정직한 얼굴이며 거울이다. 더러 분노의 발길질이 대문을 아프게 하지만, 그럴 때마다 묵묵히 받아주며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인내와 끈기로 발길질을 달랜다. 대문 사이로 흐르는 시간들이 어제와 오늘, 내일을 실어다 놓고 유유히 떠나가면, 집을 지키느라 밤마다 잠을 설치던 대문의 노고가 내 마음의 대문을 흔들며 서러운 풍경소리를 바람결에 날린다.
마음의 대문을 여는 열쇠는 바로 용서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이며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이자 행복이다. 또한 화를 녹이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처방이기도 하다. 맺힌 것을 풀면 어느새 대나무 속처럼 비워져 마음의 빗장이 열리지 않겠는가. 불어오는 바람에 덜커덩거리던 대문이 불쑥 말을 건넨다. 꾹 다문 대문이 있다면 도전과 용기로 한 번 힘차게 두드려보라고. 열릴 때까지 마음을 모아 대문의 말씀에 귀 기울려 보라고.
견고한 성(城) 위로 오월이 가고 있다. 빨랫줄에 매달린 새하얀 타올이 존재의 깃발처럼 힘차게 나부낀다. 성주의 마음도 저 타올처럼 휘날렸으면 좋겠다. 휘날리다 보면 불현듯이 대문을 나서고 싶어질 것이다. 오월 속으로 걷다 보면 세상의 소리에 닫혔던 가슴이 열리고 막혔던 혈관 속으로 오월의 체온이 소리 없이 흐를 것이다.
맞은 편 집 대문이 활짝 웃으며 나를 보고 손짓한다. 그 손짓에 끌린 나의 신발이 어느새 대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 대문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는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오월은 저만치 가고 있는데.
세상이 시끄러운 만큼 아프다고 말하는 대문 때문에 내 마음의 대문도 따라 종일 덜커덩거린다. 대문, 그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눈과 귀며 평정한 마음이 아닐까.
했음에 안도의 웃음을 주고받았다.
우리네 인생행로도 이럴 테지. 뒷자리는 또다시 언제 그런 공포가 있었느냐는 듯, 다시 ‘하하 호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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