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무종(霧鐘) / 이지원

에세이향기 2021. 8. 24. 05:45

무종(霧鐘) / 이지원



회색빛 바다는 하늘과 한 몸을 이루며 경계를 허물었다. 태풍이었다. 성난 파도는 울부짖으며 날뛰고, 바닷새는 갈 길을 몰라 바삐 날아다녔다. 바위에 부딪힌 파도가 뭍으로 튀어 올라 하얗게 물보라를 뿌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음에 이는 파고를 견디지 못해 나선 길이었다. 흐린 날이면 마음도 함께 사나워진다. 잊은 듯 살고 있다가도 불쑥 밀려드는 기억으로 극도의 불안감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태풍이 몰아치는 바닷가 언덕 위에서 바다와 마주 섰다. 무섭게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는 가슴속의 멍에를 쓸어가듯 오히려 시원하다. 하지만 몰아치는 바람은 옷자락을 붙들고 기어이 쓰러뜨리기라도 하려는 듯 몸부림쳤다.
거센 바람을 피해 등대 안으로 몸을 피했다. 나선형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오르자 등대 홍보관이 나왔다. 그곳에서 무종을 만났다.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무종을 보았다. 무종은 날이 흐려 항해하는 배가 안개 속을 헤맬 때, 소리를 내서 등대의 위치를 알려주는 해무 신호기다. 기상악화로 등대를 확인할 수 없는 배들에게 소리가 나는 불빛이 되었던 무종은 중요한 역할에 비해 겉모습은 무덤덤하고 투박하게 생겼다. 진열장 유리 너머에서 오랜 세월 말없이 전시되어 있는 황동무종은 칠십 년대까지 제 몫을 다했다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길을 잃게 하는 안개나 폭우는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때 나도 세찬 바람과 파도 속에서 갈 길을 잃고 표류하는 배처럼 방황한 적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흐릿해졌고 앞날은 짙은 해무처럼 불투명했다. 방향감각을 잃은 나는 이리저리 부딪히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삶은 내게 딴죽을 걸었다. 걸어가는 길마다 장애물에 걸려 자꾸 넘어졌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면서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병이 내게 찾아왔다.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난치성망막질환’ 은 한동안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던 비밀스런 병이 표면 위로 불쑥 솟아올랐을 때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감은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장애진단서를 들고 동사무소를 찾았던 날의 암울함을 잊을 수 없다. 먹구름을 무겁게 인 하늘은 금방이라도 내 머리 위로 내려앉을 듯 낮은 포복을 하고 있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치자 보이지 않는 등대를 찾아 헤매는 조각배처럼 나는 망망대해에서 홀로 허우적거렸다.
그동안 아주 내밀한 곳에 숨어 있던 것이 본색을 드러내자 눈보다 마음이 먼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잘 다니던 길에서도 우왕좌왕 헤맸고, 계단에서는 수시로 발목이 접질렸다. 식탁 위에 있던 유리컵이 시야에서 벗어나 행주질 하던 손에 걸려 와장창 박살나는 일이 잦아졌다. 보도불록 위의 볼라드에 부딪쳐 내 무릎은 피멍이 가시질 않았다. 어둑한 밤에 남의 차에 오르는 나를 보고 남편은 깜짝 놀라 소리쳐 불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편은 가슴이 미어졌을 것이다. 뒤쫓아 와서 부르는 소리에 나는 또 얼마나 황당하고 무참했는지 모른다.
흐릿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나의 주변은 온통 위험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수록 마음은 있는 대로 오그라들고 자신 잃은 발걸음은 한 발짝 떼기조차 힘들었다. 사는 일이 조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내 삶은 위태롭기만 했다. 달팽이처럼 몸을 말아 안으로 자꾸만 숨었다. 꿈을 안고 시작했던 늦깎이 공부를 시력 때문에 도중하차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시험을 칠 때마다 황소 눈알만큼 큰 글자의 시험지를 받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지만 시험지를 받을 때마다 민망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 무렵 남편은 자기 눈을 나와 하나씩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며 밤마다 괴로워했다.
남편은 무종처럼 무덤덤하고 살갑지도 않아 살면서 마음이 섭섭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결정적일 때 그는 환한 빛으로 우뚝 다가왔다. 어디로 가야할 지 방향을 잃은 나를 잡아주고 세워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병에는 스트레스가 가장 큰 적이다. 하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를 그만두면 더 큰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고 했다. 우리 나이에는 누구든지 시력도 지력도 다 떨어지니 천천히 즐기며 하라고 내 등을 토닥였다.
나를 걱정하던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그까짓 써먹을 곳도 없는 공부 그만두라고 했을 때 남편의 격려는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다. 위로의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말은 짙은 안개 속에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무종의 소리였다. 곡절 끝에 공부를 제때에 마칠 수 있었고 갈피를 잡지 못해 흔들리며 허우적대던 불안한 삶의 굴레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살아 보니 수평선이 뚜렷한 날이 있었고,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막막한 날이 있었다. 삶의 등고선처럼 파도 역시 높낮이를 달리하여 내게로 밀려왔다 밀려가곤 했다. 카멜레온 같은 일상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이제는 보이는 대로 바라보기보다 마음으로 보는 법을 배우려 한다. 보이지 않으나 들리는 등대에 생의 지표를 새롭게 세우고 싶다.
삶은 허들 경기와 같아서 한 고비 넘고나면 새롭게 넘어야 할 고비를 만들며 새벽 창가에 미리 와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인생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일어난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갈 것인지 지켜보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풀기 어려운 문제도 시간 앞에서는 무력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선은 아니어도 차선으로 만족할 줄도 알게 되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은 불안하고 두렵지만 그래서 다가올 미래에 희망과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으리.
미친 듯이 출렁이던 바다가 잠잠해졌다. 경계를 허물었던 하늘과 바다에 뚜렷한 선을 가로 지으며 수평선이 나타났다. 태풍이 지나간 모양이다. 마음에 일던 파고도 잦아들었다. 비탈진 언덕을 내려오며 환한 빛의 등대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중심 잃은 몸이 비틀거렸다. 그 순간 그가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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