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국수/김은주
좁은 골목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처마 낮은 선술집이 있고 우물 속같이 깊은 그 길 끝, 모리국수집이 있다. 모리집은 하루 중, 해거름에 찾아야 그 맛이 제격이다. 해가 서산으로 막 기울기 시작할 무렵, 어둠과 밝음이 적당히 공존하는 시간, 배는 허기가 밀려오고 내 두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울 때 이 골목을 찾아야 한다. 긴 골목길에 들어서면 이르게 켠 홍시 빛 가로등이 안온하게 나를 반긴다. 선술집 처마 밑으로 불콰하게 술이 오른 뱃사람들의 목소리가 고조될 즈음 골목길은 저 홀로 살아 꿈틀거린다. 반쯤 열린 술집 처마 밑으로 지글거리며 안주 익는 소리와 칼칼한 양념 냄새가 가다서는 내 발길을 잡는다.
"나는 니가 무섭다."라는 말을 남기고 피붙이 같은 사람이 내 곁을 떠났다. 목숨 부지한 동안은 살아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다 보니 이런 허전함을 등에 업고도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잠을 자며 다시 일을 한다. 해는 여전히 동에서 다시 서로 기울지만 황소바람이 드나드는 마음으 나날이 허기다. 아무리 먹어도 허리가 접혀진다. 온기 없는 마음이 얼마나 시린지 겨울바람이 오히려 따스하다. 그 무엇으로도 마음을 데울 수 없을 때 나는 모리 국수집을 찾는다. 뜨끈한 어탕 국물에 마음을 지지고 국수 몇 가닥에 인연을 읽으며 할머니의 덕담 한마디는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하기 때문이다.
모리집은 오늘도 여전히 붉은 백열등을 내걸고 그 자리 그대로다. 40년이라는 녹록치 않은 세월을 견뎌온 할머니는 바닷가 사람답지 않게 맑고 후하다. "사는 일이 다 뭐고 세상살이 후한 끝은 있어도 악하 끝은 없데이." 하시며 오늘도 선문답 같은 말 한마디로 먼 길 온 나를 반기신다. 누구에게든 후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한평생 구룡포를 맴돌며 할머니가 깨달은 삶인가 보다. 내가 철제 의자를 밀고 앉아도 뭘 먹을 것인지 묻지 않으신다. 떨거덕거리며 양은 냄비에 물을 끓이고 관절이 시원치 않은 다리를 끌며 도마에 야채를 썬다. 칸막이가 없는 주방에서 바깥으로 도라 소리가 건너온다. 파 써는 소리, 청양초 써는 소리, 뒤이어 물 끓어오르는 소리, 간간이 주방 보조인 할아버지의 낮은 잔소리. 대답을 바라지도 않는 할머니의 푸념이 오늘도 포구의 밤하늘을 메운다. 나는 탕을 기다리며 난로 위에 놓인 물그릇을 내려다본다. 붕어 눈알같이 끓어올랐다가는 다시 꺼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삶의 절정은 저렇게 한순간에 왔다 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국수를 기다리는 사이 할아버지는 오징어 한 마리를 구워 막걸리를 내 오신다. 빈속에 막걸리 한잔 마시고 도톰한 오징어 한 점 씹으니 혀 아래서 금방 단물이 차올라온다.
모리집은 맨 처음 막걸리만 배달하는 깍구집이었다. 매일 뱃일에 시달리는 어부들이 종일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다 허기진 배로 포구에 돌아오면 막걸리 한잔이 생각나 들리게 되고 안주 삼아 끓여내는 생선탕에 국수를 넣은 것이 말 그대로 모리국수다. 그날 막 잡아 온 생선을 토막 내 끓인 후 그 국물에 갖은 양념과 국수를 넣고 청양초를 듬뿍 뿌려내면 술안주도 되고 요기도 되는 것이다. 매일 들어오는 생선의 종류가 다르다 보니 누가 이것이 '무슨 국수요' 물어오면 할머니가 '모리겠다' 하시는 바람에 모리국수가 됐다는 거짓말 같은 참말이 전해져 온다.
적당이 끓은 국수는 솥 단지 채로 손님상에 나온다. 누른 양은솥을 들여다보면 엄청 많은 양에 우선 놀라고 야들하니 십히는 생선살이 기가 막히다. 국수 가닥 사이에 걸려 올라오는 게 다리 살을 한 입 먹으면 바다 냄새가 고스란히 그 안에 있다. 코를 훌쩍이며 국수를 먹는 내내 할머니는 내 곁에 앉아 살아온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 하신다. 40년 전 단돈 만원으로 이 국수집을 시작했단다. 끼니가 떨어지는 날도 옆집에 자존심 안 상하려고 밥은 못 짓더라도 물이라도 아궁이에 대고 끓였다는 할머니 말씀에 가슴이 짠해진다.
모리 국수는 삶에 지친 세상 모든 아버지의 음식이다. 가솔들을 위해 신 새벽 잠을 물리치고 바다로 나가 하루 왼 종일 흔들리는 뱃머리에서 파도와 싸우다 포구에 돌아오면 맨 처음 술이 생각날 것이고 그 다음이 밀려오는 허기일 것이다. 그 둘을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음식이 바로 모리국수다.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만 하는 그들의 쓰린 속을 누가 알겠는가? 그런 아버지들의 빈속을 모리국수의 국물이 뜨겁게 지져주는 것이다.
내가 국수를 다 먹어갈 즈음 아저씨 한 분이 가게로 들어서신다. 할머니는 물을 것도 없이 막걸리 반병과 모리국수 한 사람을 내 놓으신다. 서로 아무 말이 없다. 술은 아마도 어제 먹다 남은 병인 것 같고 아저씨는 혼자다. 구부린 등에서 시린 바람 냄새가 난다. 등 뒤로 덜 닫은 가게 문이 덜컹거린다.
나는 문 밖의 어둠을 내다보며 모리국수, 모리국수 입으로 중얼거려 본다. 모른다는 것은 안다는 것 보다 얼마나 편안한가? 세상도, 사람도, 모를 때가 행복하다. 도대체 무슨 국수인지 모르다 젓가락에 걸려 올라오는 생선의 종류를 확인하며 하나씩 알아채 가는 것, 이것이 모리국수의 묘미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르다 하나씩 알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일 가능성이 크다. 등짝에 훈기를 느끼며 골목길을 나서니 짠 바닷바람이 내 목덜미를 감싼다. 구룡포의 밤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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