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방/서숙
푸른 바다가 천장에서 바닥까지 한 벽에 가득하다.
뤽 베송의 영화 『그랑 블루』의 커다란 포스터 덕분이다. 연한 하늘색의 벽지가 하얀 책상 뒤에서, 시원한 청색의 양탄자가 흰 커튼 자락 밑에서 더욱 파랗다. 꽃병도 거울 장식도 문구들도 덩달아 제각기 다른 파란 빛을 지니고 여기저기 섬처럼 놓여 있는 이 방을 나는 '푸른 방'이라고 부른다. 코발트 블루, 인디고 블루, 클라인 블루, 울트라 블루, 시아닌 블루… 온갖 톤의 이다지도 많은 블루에 둘러싸여서 나는 그 모든 블루가 좋다.
물에 빠졌던 적이 있다. 여섯 살 아이는 허우적거리지도 못하고 떠 있는 듯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는데, 처음 겪는 무중력의 세계가 이상하게 편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완벽한 고요 가운데, 아이의 몸 주위로 온통 푸른빛이 번녀 나가던 물속의 정경에서 그때의 기억은 그만 멈추고 만다. 이 방이 나를 멀리 가득하고도 늘 선명한 영상의 푸르스름하한 색조 속에 곧잘 잠기게 해 준다.
푸른 방에서 나는 꿈을 꾼다.
일상의 건조함으로 납작 눌렸던 꿈 조각이 산 중턱 고운 물안개로 가볍게 부풀어 오른다. 지평선 너머 아슴푸레하던 기억의 성채가 윤곽도 분명하게 성큼 다가선다. 환상 여행이다. 낯선 곳으로 나를 데려가고픈 충동, 새로운 바람의 향방에 대한 호기심, 이국의 정취가 마음속 등불의 촉수를 높여 주리라는 기대를 안고 길을 떠날 때, 사면의 벽은 무한 확장되어 멀리멀리 물러선다. 벽이 멀어지는 정도에 따라 더러는 혼돈으로 흔들리고 더러는 막막하게 떠돌며 나는 사막과 바람과 바다와 습기를 만난다. 땅거미를 안고 돌아오는 시간여행의 귀착점에서 물러섰던 벽은 다시 견고하게 자리 잡는다. 푸른 방은 밖으로, 밖으로 번지는 드넓은 여행지이면서 안으로, 안으로 스며드는 격리된 도피처다.
환상 여행은 내내 푸른색이다.
청색의 이미지는 차갑고 고독하고 이성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색보다 열정적이다. 그 열정은 불꽃 없는 그러나 끈질긴 열정이다. 청색 인격을 그려 본다. 그는 투명한 의식을 지기고 충분히 강한 자의식으로 무장해 있으면서도, 의식 과잉의 흔적이 없이 감정과 이성의 밸런스를 유지한다. 그럼으로써 지적 훈련의 강도에 따라 그가 지닌 관념이 심도를 지닌다. 그가 명상가라면 내면의 심층적 의식과 삶의 다층구조에 대한 모색의 여정을 조용히 갈무리할 것이다. 한 인간이 지니는 다중성의 의미, 인간 보편의 숙명으로 짊어진 모호성, 우리가 맞닥뜨리거나 추구하는 삶의 지향에 대한 깊은 성찰이 거기에 있다. 그가 문사라면 언어가 아우르는 세계는 무한하여 문학이야말로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부단히 접근하고자 하는 운동성을 지닌다고 자부할 것이다. 그에게 책 읽기는 자아를 찾으려는 미로 헤매기이며, 글쓰기는 삶의 본질을 추구하여 떠나는 정신적 실존적 대장정이다.
그럼 나의 푸른 꿈은 어떤 것일까.
내가 아는 모든 것, 내가 모르는 모든 것,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것,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있었던 것, 그 모든 것을 차곡차곡 되짚어 보는 것이다. 삶의 여정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는 나와 타인의 시 공간을 헤집고 그 틈으로 삶을 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함몰된 전체 속에서 개성을, 역사 속에서 개별자를, 다시 개별성 속에서 유사성을 인식하고 파악하기 위해 시선을 모으고자 한다. 그러한 탐색전을 바탕으로 나는 푸른 글을 쓰고 싶다. 어떤 이의 마음의 현을 건드려 여린 감성의 새순이 돋아나듯, 가슴이 아픈 듯 따뜻해지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그래서 '그래,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 라고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혹은 '아, 정말 그렇구나.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새롭게 깨달아 그의 머리가 맑아지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마음과 정신이라는,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세계를 탐구하다가 그로써 자기만의 언어를 완성하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다.
그러니까 푸른 방은 패러독스의 세계다.
글쓰기는 고독 속의 독백이고 몰입이다. 푸른 방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굴릴 때 나는 혼자다. "인간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가장 활동적이며, 철저하게 혼자 있을 때야말로 가장 고독하지 않다."는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안에 대하여 나름으로 느낌을 나열하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이렇게 저렇게 애쓰는 것은 결국 '그렇지 않아요?' 하고 세상을 말을 걸어 타인을 끌어들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건 직접 대화를 나누는 방식보다 더욱 자아를 확대시킨다. 하긴 대화에 목마르지 않은 사람들은 글을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석가도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책을 남기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써 놓은 글이 나에게 들려주는 고백임과 동시에 세상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이 방은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발돋음의 터전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또 있다. 여러 가지 상념을 늘어놓다 보면 오락가락 종잡을 수 없이 뒤섞인다. 어느 때는 '원시적 생명력과 격정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또 어느 때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고 깊이 수긍한다. 이미 써 놓았던 글을 전혀 다르게 고치는 일도 빈번하다. 어느 것이 진짜일까. 시간에 따라 변화의 추이만 있을 뿐 진실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푸른 방에서는 변주곡이 흐른다.
이 방의 청 색조 안에서 나는 언어의 미로 속을 헤매며 편린을 집어 들고 분주하고 분석하고 취합한다. 이렇게 공들여 쌓아 놓은 말들이 그런다 다 낯이 익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남이 대신 써 준 것 같은 글이네요.'나의 글을 읽고 사람들은 내게 그런 말을 묻는 표정을 짓는다. 자기화의 과정에서 예전의 어떤 것과 닮은꼴이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나는 나를 설득한다. 한 인격체에서 여러 가지 모습이 겹쳐 있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속에 같은 생각이 자리 잡는 것이니, 내 안에 그들 속에 내 모습이 당연히 들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얘기를 조금씩 비슷하게 조금씩 다르게 변주곡으로 내놓을 수 있을 뿐이다. 마치 이 방에 조금씩 명암과 채도를 달리하는 많은 푸름이 있는 것처럼.
푸른 방은 내게 마법을 건다.
내 안에는 여러 겹의 자아가 있다. 나와 추상의 나, 나와 나의 그림자, 나와 나의 배반자가 끊임없이 공존한다. 그것들이 분열과 통합을 반복 합성하고 나면 내가 썼으되 마치 누군가의 대필처럼 생소하면서도 경이로운 세계가 앞에 펼쳐진다. 이 마술의 세계에서는 붓끝에 글이 따라 나오고 글이 글을 부른다. 이 알 수 없는 이끌림은 아마도 최면과도 비슷하다. 사람들이 더러 내 글이 의외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그런 면이 있었나요? 평소 모습과는 많이 다르군요.' 라는 뜻이다. 글과 사람은 별개인가?아니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 단지 푸른 방이 만들어내는 마술의 세계가 현실의 외피 아래 품고 있던 여러 갈래의 자아를 다채롭게 펼쳐 보일 뿐이다. 아, 그러니까 마술에 걸리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서투르게나마 약간의 마술을 할 수 있게 되나 보다. 마법에 걸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은.
이 푸른 공간이 아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