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리 절터를 찾아서/고경숙
강물도 시들었는지 시냇물로 흐른다. 한때는 소용돌이치는 급류에 휘말렸을 대종천의 우람한 지류다. 날카롭게 모난 바위들을 아우르기도 했던 강은 바닥을 보이고, 빛 바랜 돌덩이들만 뼈대를 드러낸 강가에 나뒹굴고 있다. 물소리가 독경소리로 흐르던 옛 영화를 바위 틈 가녀린 물길이 뒤따라오며 길을 풀어낸다.
울창한 잡목이 윤기를 잃어가는 토함산 자락이다.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산'이라 했던가. 역사의 향기가 물씬나는 산길을 가파른 마음이 먼저 오른다. 우듬지가 꺾인 돌배나무에 몸을 기대자 핼쓱해진 이파리사이로 숨은 듯 서 있던 석탑이 반기는 눈치다.깍아지른 절벽 아래로 석축을 쌓았지만 엄습하는 아찔한 두려움은 새로 조성한 콘크리트 길 때문이다. 홍 수가 질 때마다 제 뿌리를 할퀴며 뼈와 살을 허물어내리는 산의 허리를 잘라 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풍화에 든 계곡의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멀게만 느껴진다.
장항리 절터! 제 본래의 이름자는 잊혀지고, 흔하디흔한 지명을 좇아 부르는 적막한 폐사지, 불국사며 석굴암이 측은한 눈빛으로 굽어보는 산기슭 비탈진 곳에 자리하고 섰다. 푸르게 넘실대던 대종천이 시냇물로 흐르는 유규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이 절 또한 흥망성쇠의 파고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졌으리라. 아무도 돌보는 손길 없는 땅에 웃자란 잡초만이 초석을 움켜쥐고 작은 풀씨로 생명의 질긴 뿌리를 연명한다. 그래선지 절터에 부는 바람은 지는 해 그림자처럼 엷은 우수에 잠길 때가 더 많다.
절집은 사라지고 석탑만이 남아 폐쇄된 시간의 빗장을 슬몃 열어 보인다. 출토된 유물에 의하면 문무왕대에 창건된 절로서 삼국통일이 위업을 달성한 왕은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호국사찰을 곳곳에 세웠다고 한다. 죽어서 용이 되어 왜구를 무찌르겠다는 우국지정의 그가 아니던가. 제 너머 기림사며 골굴암, 훗날 감은사를 오가며 만파식적 피리소리에 태평성대를 노래하던 발걸음이 분주했을 그 때야말로 이 절의 전성기였는지도 모른겠다. 옛 사람이 가고 없는 빈터에 낮달만이 초점 잃은 눈으로 탑돌이를 하고 있다.
금당터에는 연화문을 돋을새김한 깨진 불대좌가 자리하고 있다. 전설 한 자락도 남아있지 않는 이 곳에 마음이 자주 멈춰서는 것도 절을 중심으로 한 쓸쓸한 풍경이 주는 여백 탓이다. 주인 잃은 회한이나 간절한 그리움에의 본능적 감상과 조우를 한다. 그리고 산산조각이 나 시멘트로 땜질한 박물관 뜨락의 준수한 석불을 모셔놓고 상처가 일으켜 세우는 강인한 힘을 지켜본다. 빗물이 담겨 있는 네모진 홈통에서 새틀이 날아오르고, 살내음이 은근한 기단석에는 정교하게 조각한 사자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표정 없는 돌에다 생동감을 불어넣은 석공의 손끝 불심이 극진하다.
금당을 중심으로 두 탑을 세웠다. 온전한 서탑에는 인왕상이 두 눈을 부릅뜨고 불끈 솟은 근육을 과시하는데 수문장으로서의 위엄이 넘쳐 파손된 동탑과는 달리 늠름하고 당당해 보인다. 좁은 절터의 규모에 비해 큰 불상과 탑이 이 절의 내력이 범상치 않음을 짐작케 한다. 시루떡을 쌓아놓은 상처투성이 동탑은 한 세월을 질곡으로 살아낸 탑이다. 도굴범에 의해 수난은 겪은 뒤 부서진 석물들을 쌓아 놓은 것이다. 모서리가 깨진 지붕돌은 인간의 탐욕 그 자체다. 하지만 왜소하거나 나약하지가 않다. 상처로 남는 뒤안길에는 아픔조차도 더 단단해지는 모양이다. 화강암이 삭아 구멍이 숭숭 뚫린 탑신에 돌이끼가 피어나 고색이 짙다. 무너진 탑에서 이상하게도 선고 악, 강자와 약자, 완성과 미완성, 긍정과 부정, 혁명과 자유 따위의 낱말들이 몸돌이 되어 어리석은 마음에 탑을 쌓곤 한다.
탑은 부처의 사리를 모셔놓은 집이다. 집의 뼈대를 마련하듯이 탑을 세우는 일은 자비의 사상이다. 직선의 탑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은 수평의 점으로 이어진다는 뜻일까. 파손된 지붕돌을 점자처럼 읽어 내려가면 손끝에 천년 세월이 만져진다. 동시에 허망한 스러짐을 삭이는 아픔이 물결무늬로 온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처럼 저마다 다른 길로 가는 탑의 운명에서 허기진 삶이 위안을 얻는다. 지금 서탑은 상흔을 어루만지는 아픔으로 탑머리가 하늘에 닿아 있다. 잃어버린 풍경소리를 듣던 귀가 환히 열리면서 과거로 돌아가는 현재가 보인다.
이 곳의 바람은 죽비소리로 온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탑은 늘 조마조마하다. 봄이면 연두빛 새싹이 터지는 느릅나무 줄기마다 안개가 실꾸리처럼 풀리고, 여름이면 탑머리를 내리치는 땡볕이 금빛으로 반짝인다. 지천으로 핀 들국화가 저문 햇살에 매달리는 가을이면 눈물나도록 쓸쓸하고, 멀리서 서릿발을 밟고 불대좌로 걸어오는 겨울은 또 얼마나 막막하던가.
화려했던 과거가 처연히 눈 뜨는 폐사지, 언젠가는 소멸할 시간이지만 새롭게 태어남을 예감하는 곳, 그래서 작은 물살같은 일렁임으로 흘러보맨 꿈을 찾아나서는 발걸음이기도 한 장항리 절터는 내 마음의 후미진 곳에 화석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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