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관하여 / 고경숙
창밖에는 고작 너댓 명의 아이들뿐이다. 우르를 떼지어 몰려다니는 것도 아닌데 날뛰던 고함소리는 오간데 없다. 롤러브레이드를 타면서 내지르던 함성이 비명처럼 귓바퀴에 실릴 뿐이다. 잘못 들었을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리가 소리를 껴안고 먹구름처럼 부풀어올라 아파트를 휩사고 돌았는데 말이다. 급기야 나는 그 소리로 신경이 곤두섰으며, 읽고 있던 책마저 덮지 않았던가. 아이들과 놀 때는 소리도 덩달아 기분 좋게 뛰놀고, 침묵하는 마음에서는 소리 역시 심드렁해지는 모양이다. 아직도 귀에는 쫙쫙 퍼붓는 장대비소리가 내리치고 있다.
사방이 고층 아파트로 밀집된 탓인지 하늘조차 운신이 벅찬지 잔뜩 흐려 있다. 후덥지근한 바람의 꽁무니에 매달려 콘크리트 바닥에서 자라는 풀 포기같은 아이들. 아마도 저 아이들을 두고 '아스팔트 킨트'라고 불렀나 보다. 흙이라곤 없는 삭막한 땅에 뿌리 내리려고 저리 발버둥치며 뛰어다니는지도 알 수 없다. 지신을 밟듯이 소리로 꾹꾹 채워 땅속을 눌러 다지자는 속셈일까. 느슨한 틈새를 기다리며 숨막힐 지경이라고 앞다투어 소리들이 농성하고 있는 듯하다.
문득 베란다너머로 빙 둘러선 아파트가 어릴 때 까치발로 들여다 본 큰 독이거나 우물 안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어둑신한 우물에 대고 소리를 지르면 우물은 떨리는 음성으로 우우거리며 화답하곤 했다. 그 소리는 다른 소리를 꿰차고 늘어지던 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리를 집어삼킨 속내로 꿈틀대던 소리의 봉기蜂起. 일어선 소리들은 빈 우물 안에 갇힌 채 사람만 보면 서럽게 바람처럼 울었듯이 독도 스스로의 벽에 부딪히는 아픔으로 목놓아 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바람이 되고 싶은 아이들이 콘크리트 숲속에서 울 수 밖에 없다는 몸짓으로 비좁은 주차장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것 같다.
간밤에 또 누군가 드릴로 못을 박고 있었다. 진동음으로 건물이 기우뚱 쏠리는 환청을 듣는다. 날마다 서투른 피아노 소리가 끊일 새가 없고, 쾅 하고 닫히는 둔탁한 현관문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란다. 윗집 아이들은 부엌에서 거실로 쿵쾅거리며 뛰어다닌다. 소리가 소리를 불러들이는 아파트는 거대한 소리의 집산지 같다. 온갖 소리로 집 한채 세운 듯하다. 소리로 기둥을 세우고 소리로 벽을 만들어 소리로 창틀을 끼운다. 마치 소리가 세상을 떠받치는 힘처럼 잠시도 소음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곳이 아파트다. 아파트 생활이란 소음을 이웃 삼아 소리에 파묻혀 사는 꼴이다.
우리는 소리를 떠나서 살 수가 없다. 소리와 더불어 세월을 난다. 소리에 갇혀 분노하며 목말라 하기도 한다. 공장의 기계소리, 차량의 경적소리, 골목길을 누비는 노점상 마이크소리,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는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앞서길 좋아하고 지나치게 뚝뚝 불거지며 끊기는 새된 소리는 삶의 질서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북소리나 징소리, 사물놀이패의 흥겨운 가락 같은 듣기 좋은 소리는 가슴을 촉촉히 적셔 준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죽지에 힘이 실리면서 고조되는 감정으로 신명이 난다. 구성지고 유장한 남도민요는 가슴까지 차 오르는 넉넉함이 있어 좋다. 새소리나 바람소리의 여운은 또 어떤가. 이렇듯 세상은 싫고 좋은 소리로 가득 찬다.
이 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철도 기지창 부근에 살았다. 새벽녘이면 어김없이 잠을 설쳤다. 화물차끼리 쇠고리를 끼우는 작업중 일어나는 날카롭고 둔탁한 소리는 참기 힘든 굉음이었다. 새벽부터 쇳소리에 시달리면 하루종일 귀에서 카랑카랑 금속성 소리가 났다. 이명처럼 들리던 그 소리들이 어느 날부터 점차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잠잠해진 소리는 내 귀와의 타협을 원햇던 것 같다. 체념하면서 서서히 소리에 길들여져 마음에 모나지 않게 두루뭉실하게 변해 갔을 터이다. 귀를 막고 거부하며 들어온 횟수만큼 묵은 정으로 거듭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떤 소리든지 저마다의 존재 의미를 알리고자 사람 곁에 머문다. 사람이 소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사람을 찾아 나선다. 사람들이 언어로 대화를 나누듯 사물은 소리라는 기호로 저마다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리라. 소리는 귀로 누릴 수 있는 멋이며, 열림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전주곡이기도 하다.
조지 위스턴의 피아노곡[대평원]을 들으며 삼베 홑이불을 손질하는 날은 마음이 들뜬다. 어디선가 마른 풀 냄새가 선율을 탄다. 거친듯하면서도 투박하고 은근하면서도 부드러운 흙내음도 갈앉은 마음에 생기를 가져다 준다. 뭇 생명을 품어 키우는 땅을 향해 자장가를 부르며 발걸음을 옮기노라면 밀밭이 있던 유년의 고향이 보인다. 바지랑대 위의 빨랫줄에는 누렇게 삼 줄이 빛을 바래고, 젊었을 적 어머니가 길쌈을 하고 계신다. 곧추세운 무릎에 거친 손바닥을 비벼 가며 삼줄을 엮을 때의 사분대던 소리는 참으로 듣기 좋았다. 맑고 단조로운 나무바디 소리와 굳은살이 빚어 내는 육감적인 소리는 어머니의 냄새로 다가섰다. 이제는 가진 것 모두 놓아 버린 어머니, 떠나 보낸 자식들의 마음의 소리까지도 모두 듣고 계신다. 살아가면서 추억이나 그리움은 아름다운 소리인 반면 슬픔이나 절망, 패배와 같은 것은 비켜서고 싶은 소리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파트에 층수가 있듯 내 마음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퇴적층이 있다. 다양한 소리로 견뎌낸 윤기 잃은 목소리가 나의 세월이다.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무심코 긁는 바가지나 잔소리, 무관심 따위로 신경질이라는 고질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리에 동화되지 못하는 이기심으로 내 마음밭은 사랑이나 너그러움이 자라지 않는 묵정밭이다. 그러나 가시덤불처럼 엉켜 불협화음을 이루는 불모의 땅에도 침묵보다 더한 애정이 자라는 것을 종종 본다. 내가 가끔씩 귀를 기울이며 소리를 기다리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소리가 없다면 세상은 적막에 빠져들 것이며, 그 적막이 답답해 일부러 큰 소리로 침묵을 방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소리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오히려 소리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저 아이들의 소란스러움도 언젠가는 내 귀에 잔잔한 평화로움으로 들릴 날이 있을 것이다.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다. 똑 같은 소리가 때로는 소음이 되고 때로는 노래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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