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미소, 수막새 기와/고경숙
수막새 기와 한 점을 샀다. 진열장 속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 불빛을 이리저리 당기며 웃음의 각도를 재엇다. 얼굴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보일 때가 이목구비의 윤곽이 뚜렷해지면서 표정도 살아났다. 돋을새김한 미소도 한결 선명해진다. 못에 매달아 놓을 끈에 손가락을 집어 넣고 보니 웃음이 나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천년의 미소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흐르는 콧잔등이며 무슨 생각에 골몰한 듯 아래로 내리감은 눈, 반쯤 깨진 얇은 입술엔 미소가 묻어 나오고, 도톰한 볼에선 금방이라도 파안대소를 터뜨릴것만 같다. 영락없이 어질고 순박한 옛 어머니의 모습이다. 마음은 사라지고 없는 것에 연민과 안타까움을 더한다. 아래턱이 떨어져 나간 부위를 어루만진다. 잃어버린 반쪽의 얼굴은 눈을 감아도 그려넣을 것 같다. 상처를 입고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친근감으로 다가선다. 아마도 저 얼굴의 주인은 부처님이시던지 아니면 그를 닮으려는 어진 백성인지도 아니면 수월관음이 현신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른 진열장에는 연꽃이 흐드러지게 핀 수막새 기와들이 많았다. 만개한 꽃송이들은 서로 닮아 보이지만 조금씩 다르다. 비틀고 휘어진 꽃잎이며 꽃술의 모양이 제각각이다. 그것은 마치 지루한 장마 끝에 물안개 뒤척이던 날의 서출지 꽃밭 같다. 수백만송이의 연꽃이 스멀거리는 안개 사이로 서서히 꽃잎을 벙글기 시작할 때면 회색빛 장삼을 입고 저녁예불에 참석하는 비구니의 행렬이다. 당초넝쿨이 벽면을 줄기차게 뻗어 나가고, 기린이며 도깨비가 숨어 있는 마을을 지나도 '얼굴무늬 모양의 수막새'가 단연 돋보인다.
절집 처마 끝에 매다는 심정으로 가지고 온 수막새를 거실 벽면에 걸었다. 눅진하던 집안이 생기로 가득찼다. 흰벽과 거뭇한 와당이 정갈한 아름다움을 낳고 있다. 아득한 세월 저편으로부터 날아든 귀한 미소가 내 삶의 무게를 홀가분하게 한다. 유머 그 이상의 활력소로 다가선다. 용마루 너머 뒷산을 품은 기와지붕을 유려하게 장식했을 수막새 기와,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눈이나 비를 동무하며 낙숫물 소리에 바람처럼 귀를 곤두세웠을 것이다. 이윽히 바라보면 옛 사람의 고요한 숨결이 내 시선으로 젖어든다.
연꽃무늬와 얼굴문양 수막새를 번갈이 보고 있으니 "점화의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영산법회에서 부처님이 들고 있는 연꽃을 보고 불법을 깨우쳤다는 가섭, 스승과 제자의 이심전심이 수막새 기와 속에 한 떨기 꽃으로 피어난다. 손바닥만한 와당에 아로새긴 미소, 어쩌면 그 꽃은 설법이자 부처님에게 올리는 극진한 꽃공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태초에 흙으로 인간을 빚고, 웃음을 가장 나중에 만드셨다지 않는가. 덧없이 사라지는 미소에 생명을 불어넣은 와공의 솜씨가 놀라울 따름이다.
수막새기와에 담긴 미소는 신라인들의 꾸밈없는 심성이다. 해마다 피는 순간을 영원 속에 머물게 한 안목이 눈부시다. 욕심이나 질투, 불만이나 아첨이 없는 자의 환한 웃음이다. 누군가를 지극히 사모하는 기운이 배어 나며, 붉게 물든 산등성이를 넘어 황급히 돌아올 지아비를 기다리는 여인의 애틋한 심사와 장작가마 앞에서 상기된 얼굴로 귀향일을 손꼽아 헤아리며 아내를 그리워하는 지아비 와공의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정이 녹아들어 있을 법도 하다. 혹여 청동거울 속에서 속울음을 삼키는 제 누이의 체념하는 눈빛도 들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반쪽의 얼굴로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비장미를 더할 뿐이다.
동남산의 감실부처가 다소곳이 앉은 자태로 온화한 미소를 띄우고, 삼화령 애기부처는 귀엽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계곡마다 뿌린다. 솔바람 건 듯 부는 삼릉골의 배리 삼존불의 미소는 고요하고 신비롭다. 황룡사의 치미를 장식하는 천연덕스런 웃음은 재치에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허공에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웃음보를 매달아 놓았던 신라사람들, 인간과 종교가 구현한 최대의 걸작품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설국암 본존불의 풍만한 얼굴에 흐르는 자비의 미소는 엄숙과 위엄이 한층 부드러워지고 있다.
이처럼 단단한 돌 속에 생명을 깃들게 한 신라인들의 염원은 바로 그들 미소가 만들어가는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움직이는 해살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미소를 막새기와에 새기고 태평성대를 노래한 신라인들의 의지는 옹골차고 야무지다. 저 보일 듯 말듯한 미소야말로 나라의 번영과 힘의 근원이라고 믿었으며 부처님이 다스리는 나라, 불국토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용마루 너머로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기쁘게 맞이했으며 그 편안하고 따스한 미소로 미욱한 중생을 제도했을 것이다.
고된 노동의 여유를 틈타 와공이 진정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은 구김살 없이 웃고 있는 환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무심한 마음으로 무심한 손길로서 욕심없이 빚은 와당이기에 만면에 띤 미소는 침묵을 넘어선 설법이요 종교 그 이상인 것이다. 발효된 시간 속에서 이름없는 와공의 작품이 진가를 발하는 것도 그 대문이다. 귀한 인연으로 마음자리를 적시는 수막새 한 점에 하늘의 구름, 해, 별 , 달과 조우하며 무한의 꿈을 펼쳤던 신라사람들, 흔한 막새기와 하나에도 그들은 웃음을 만들고 너그러움을 지었다.
구르는 돌 하나에도 꺼지지 않는 혼불을 피워 냈던 사람들. 그 어떤 부대낌도 얽매임도 없이 소박한 자유를 갈망하며 그들 겸허한 마음의 거울이었던 수막새기와 한 점이 연꽃처럼 활짝 피어나고 있다. 마음 속 꽃불을 지펴 익힌 미소로 피워 낸 수막새, 그저 빙그레 바라만 보고 있다. 복잡하고 바쁜 세상에 활짝 웃으라고, 꽃향기 멀리 퍼지듯 잔잔한 미소 은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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