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모루/정문숙

에세이향기 2021. 5. 3. 11:29

모루/정문숙

 

 

어머니를 휠체어에 앉히고 초록 양철 문을 연다. 오랫동안 주인을 기다렸던 녹슨 아우성이 일제히 터져 나온다. 아버지 대신 뽀얀 먼지를 둘러쓴 거미줄이 먼저 달려와 어머니의 가슴에 안긴다. 거미줄을 떼어 내려 손을 뻗자 어머니는 그것마저 그리웠던 듯 그만 두라며 내 손을 잡는다.

휠체어를 밀고 안으로 들어선다. 주인은 떠나고 기계마저 들어내 말문이 막혀 버린 정미소는 텅 빈 가슴을 열어젖히고 한바탕 넋두리라도 풀어놓을 기세로 한때 주인이었던 손님을 맞이한다. 정미소의 수문장으로서 기세등등하던 양철 문은 아버지의 헛기침처럼 두어 번 쇳소리를 내다 스스로 닫히고 만다. 찢기고 허물어진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별빛 같은 햇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어머니와 나는 무대 위의 주연배우처럼 서 있다.

오랜 세월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던 얼기설기 덧댄 나무기둥과 작은 들보와 대들보가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어둠을 밀어낸다.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괭이와 호미, 녹슨 낫이 무대 뒤의 조연배우처럼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엉성하여 아슬아슬하다. 양철로 둘러쳐진 벽은 바람이 불면 곧 쓰러질 것만 같고 비라도 쏟아지면 흥건하게 발목을 적시는 서러움을 막을 재간이 없겠다.

어머니는 휠체어에 앉아 눈을 흡뜨며 주변을 살피고 있다. 쌀을 도정하던 곳에 시선이 머문다. 흔들리는 채 위로 아이처럼 까르르 웃으며 구르던 하얀 쌀알들이 있던 자리에는 이 빠진 대나무 평상만이 덩그렇다. 밀방아를 찧던 곳에는 오래된 장작들이 지난 생이 찰나의 꿈이었노라 회상하듯 옅어지는 나이테만 세고 있다.

한 손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은 등 뒤로 돌려 겨드랑이 아래로 넣어 부축하니 어머니의 하얀 정수리가 보인다. 예전보다 키가 한 뼘이나 작아진 듯하다. 걸음마처럼 몇 걸음 떼다 서기를 반복하며 안을 둘러보며 걷는다. 허공에 주렴처럼 드리운 거미줄은 장이 끝날 무렵 휘늘어진 만국기 같다.

여기저기 눈인사를 건네던 어머니는 원동기가 있던 자리로 걸음을 옮긴다. 그곳은 정미소의 심장이었고 아버지의 심장이기도 했다. 원동기는 아버지와 함께 달리고 함께 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신앙처럼 쓸고 닦았다. 원동기 옆에 아버지의 자리가 있었다. 벽에는 연장들이 걸려 있었고 아버지는 쇳조각이나 양철을 구부리고 잘랐다. 제 모양을 갖출 때까지 쇳덩이를 두드리고 담금질하고 또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흠결이 없는 물건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제는 주인을 기다리느라 망부석이 되어 버린, 손만 대면 곧 스러질 것 같은 리어카와 경운기가 얕은 숨을 고르고 있다.

근래 들어 제법 긴 병원 생활로 오래 집을 비웠던 탓일까. 어머니가 오늘따라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자리와 시간의 더께로 채색된 정미소와 세세한 눈 맞춤을 한다. 어머니의 시선이 쓰다듬은 자리에는 온기가 돌아 예전처럼 원동기는 힘차게 구령을 붙이고 기계들은 일제히 소리 맞춰 돌아가면 정미소는 세상 속 또 다른 세상인 듯 어머니와 내 기억에만 존재하는 시간으로 흐른다.

원동기 옆 구석진 곳, 아버지의 자리를 돌아 나올 때 어머니가 잠시만 멈추라며 손에 힘을 준다.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둥글넓적한 쇠뭉치가 있다. 잰걸음으로 가서 집어 드니 두 손바닥 크기의 쇳덩이, 모루다. 아버지가 연장을 다듬거나 구부러진 못을 펼 때 사용하던 모루가 그대로 붙박여 있었던 모양이다.

꽤 묵직한 모루를 어머니 앞에 내밀었더니 불편한 두 손으로 먼지를 닦아내고 어루만진다. 망치의 힘을 받아내느라 안간힘을 쓴 모루의 허리는 양 끝보다 엄지 두 마디 정도가 더 낮다. 아버지가 만들어 낸 연장들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모루의 키는 조금씩 낮아지고 안으로 삼키는 말들이 많아졌을 거다.

땅땅 두드리는 망치 소리에 묻혀 버린 모루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쩌면 쉬지 않고 돌아가던 원동기 소리에 묻힌 아버지의 한숨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짬이 나는 시간이면 모루 앞에 앉아 묵묵히 농기구를 다듬었다. 얇은 함석 조각을 잘라서 양동이나 대야의 구멍을 막기도 하고 어떤 날은 철을 잘라 만든 솥단지 아궁이를 만들어 놓고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이리저리 돌려 보며 모난 곳을 잘라내고 다듬어 내던 아버지가 저기 계신 듯하다.

모루 옆에는 늘 망치가 있었다. 망치는 녹록지 않은 세상이었고 때론 우리가 힘껏 발돋움하여 꿈꾸던 세상으로 갈 수 있게 하는 요술방망이기도 했다. 자식이 큰 권세라도 되는 양, 제욕심껏 가슴에 품은 세상을 주문하고, 아버지는 우리가 쏟아 내는 주문을 받아 내느라 등이 휘는 줄도 모르고 종일 망치를 두드렸다.

아버지의 허리가 휘청거릴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모루가 되었다. 아버지가 남의 집 기계를 고치러 가서 집을 비우면 어머니는 아버지 몫까지 해냈다. 시골 인심이 권하는 술에 거하게 젖은 아버지는 도랑 옆 대나무가 울리도록 노래를 부르며 집에 오셨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우는 아이 달래듯 밤새 술주정을 받아냈다.

다음 날 미안함에 쩔쩔매는 아버지를 고운 시선으로 흘겨보면서도 술국을 끓여 정갈한 밥상을 차려 냈다. 또 아버지가 세상의 무게에 버거워할 때면 어머니는 풀무가 되어 나긋나긋한 손길로 아버지를 다독였다. 아버지 뜻에 맞춰 평생을 펴고 휘며 반듯하게 집안을 이끌어 나간 어머니, 식솔이 늘수록 품은 더 넓어졌고 품이 넓어질수록 힘에 부친 등과 허리는 점점 굽었다. 아 역시 내게 주어진 삶을 힘겹게 버텨 내느라 어머니의 허리가 굽은 줄도 키가 한 뼘이나 줄어든 것도 모를 만큼 무심했다.

세상에 내어놓은 자식들이 자리를 잡는 동안 노심초사 지켜보며 서투름에 쏟아 낸 무수한 말들을 가슴으로 받아 내느라 등허리가 저리 휘었을 거다. 큰 혈관이 부풀어 작은 혈관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잠시 누웠다 일어나면 괜찮겠지, 마당에 널어놓은 벼를 거둬들이다 쓰러져 버린 어머니다. 잠자리에 들 때나 일어나면 자식들 일로 한 시간을 기도한다는 어머니, 다급한 일이 생기면 무조건 어머니를 찾는 우리에게 어머니는 여전히 든든한 모루다.

그간 엽렵하게 살피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에 무거운 줄도 모르고 모루를 들고 있다. 어머니는 모루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며 눈을 지그시 감는다. 아버지의 자리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구석진 곳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모루를 보니 소중하고 귀한 것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제자리를 지키는 것들은 대체로 그런 모양이다.

모루를 보니 빛나고 높은 곳만 오려다보다 작고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 건 아닌지, 앞을 보며 가느라 무심히 흘려보내는 것은 없는지 뒤돌아보게 된다. 자잘한 생각들을 속으로 삭이고 묵묵히 가슴을 비워내며 자식들을 세상에 반듯하게 내놓으려는 일념으로 무시로 담금질하던 부모님, 자식들에게 곱게 빚어낸 것만 주려고 허드렛일 궂은일 마다치 않던 두 분의 사랑을 내 나이 쉰이 넘어서야 헤아릴 수 있겠다.

휠체어를 밀고 정미소를 나선다. 자꾸만 뒤돌아보는 어머니를 옆자리에 앉히고 양철 문을 걸어 잠근다. 주인은 없어도 아버지의 모루에는 달도 별도 앉았다 가고 바람도 머물다 가겠지. 운전석에 앉아 어머니의 등에 살며시 손을 얹는다. 미세한 떨림이 전해 온다. 숱한 비바람이 드나들었을 어머니의 등에서 숨죽여 흐르는 강물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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