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일기 / 이인주
마파람이 가슴을 넘나들어 잠이 오지 않는다. 몇 번을 자는 시늉으로 뒤척이다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복성재로 향한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은 자연 발길이 이쪽으로 향한다.
나는 지금 보름째 현산에 머물며 손암의 뒤를 좇고 있다. 손암의 육중한 그림자가 내 안에 들어와 겹쳐지며 하고 싶은 말들을 주술처럼 쏟아낸다. 그의 말 가두고 있기가 버겁다. 언덕길을 오르니 갑갑하던 숨이 좀 트이는 듯하다. 복성재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온통 붉은 기운으로 뒤덮여 있다.
근 열흘 동안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해 왔다. 혜성이 꼬리를 길게 동쪽으로 뻗치더니 서쪽 바다 쪽으로 떨어지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숲의 저편으로부터 엄습해 온다. 내게 지금보다 더 암담한 상황이란 상상하기도 아득한 일이다. 피바람과 더불어 한 집안이 주저앉고 식솔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하늘을 섬기는 일과 임금을 섬기는 일이 한 뿌리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것들이 궁금하다. 내가 아는 서학이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인간은 평등하고 하늘이 인간을 내신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무슨 역도의 음모란 말인가? 나는 임금과 백성을 경애하고 그들 또한 나를 자애하거늘 무엇이 우리 사이를 이토록 비틀어 놓았는지…. 그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더 깊고 궁즉통인 진리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살아서 그 진리에 닿고 싶다. 내 비록 여기 이렇게 캄캄한 섬까지 유배된 몸이지만 나의 한없이 궁금한 진리에의 갈망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다. 하늘의 이치는 수레바퀴와 같고 만물은 바람 속을 달릴 것이다.
서녘 바닷가엔 바람이 서느럽다. 올망졸망한 포구길을 돌아 선착장에 닿으니 갯강구 떼가 새까맣게 향방도 없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곧 세찬 바람이 불어 닥칠 것이다.
조반을 먹고 있는데 비보가 전해졌다. 임금께서 승하하셨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은 것이다. 아아,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던 임금께서 돌아가시다니…. 한나절 내내 염소우리 같은 좁은 섬을 맴돌았다. 검수 같고 도산 같은 캄캄한 지옥의 바위섬을 비척이며 나는 망연하다. 이제 누가 있어 나를 어여삐 여기며 손수 위무의 말씀을 건네줄 것인가. 눈물이 앞을 가려 길이 자꾸만 흔들린다. 내가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사방 포위된 동백숲에 동박새가 쉴 새 없이 불안을 찍어나른다. 제 울음에 취한 듯 새가 운다. 저 새의 혼이 내 안에 옮겨와 앉는다면 나는 이승의 한을 울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이치를 한 몸에 꿰고 싶은 새는 세상의 때를 그의 부리에 묻히지 않는 법, 내 다시 태어난다면 오직 만물을 위무하는 부리를 숨긴 정결한 새로 태어나리라.
신지도에서 이곳 흑산도로 옮겨온 지도 어언 몇 해인가. 이곳은 몹시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을 주는 곳이다. 올망졸망한 집들이 몇 채 안 되는, 마을이 등불 아래 가물거리는 절벽을 돌며 고래가 우는 그런 곳이다. 빳빳한 사람도 기가 쉬이 꺾일 것인데 하물며 오랜 곤욕을 겪은 몸이라 마음이 더 구차해진다. 그러나 멀리 있어 욕볼 처자를 생각하면 마음을 애써 시원하게 가진다.
방문객 하나 없는 이곳은 마냥 조용하기만 하다. 부산하게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는 곤줄박이의 날갯짓 소리에 눈을 감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다. 서울에 남아 있는 가족 생각, 멀리 떨어진 강진에 머물고 있는 아우 생각에 서글픈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리움이 간절하면 나뭇잎 비껴 내리는 그림자가 사람으로 보인다. 인편으로 부쳐온 아우의 서신을 받고 울컥, 목이 멘다. 이 처량한 흑산을 현산이라 고쳐 부르는 아우의 살뜰한 다정함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도 나처럼 이 검고 쓸쓸한 유배의 날들을 어떻게 견디는지...
“초당에 앉아 한나절 蓮池를 바라봅니다. 못물에 풀린 구름이 저보다 환한 하늘을 삼키고 시치미를 뗍니다. 눈치 챈 금빛 잉어가 주둥이를 내밀어 다급한 맥박을 전합니다. 공중에 흩어지는 물고기의 숨같은 초서들, 茶香이 식어갈 때 애써 원망하지 않습니다. 눈귀를 닫아건 세상과 고인 세상에 몸 적시는 자들을. 그들도 우리도 탁한 당쟁의 못물에 갇혀 어지럼증을 앓고 있으니, 이 아픈 耳鳴을 언제쯤 풀겠습니까. 공명도 부귀도 이미 먼 북방의 풍문처럼 아득하고 저는 한갓 시골벽지에 몸이 매인 몸, 문지방을 넘은 뜻만 하늘만큼 자라 날마다 펼 수 없는 韓紙에나 넓힐 뿐 바람을 갈아 칼을 벼린들 무엇 하겠습니까. 내가 쳐내야 할 숲은 난마로 얽혀 밤이면 가슴에 채이는 물소리가 쇠 끓는 소리처럼 나를 끓이는데... 목민심서, 목멘 심사... 오후엔 우이봉에 올라 멀리 흑산도를 바라봅니다. 파도에 홀로 몸 말리고 있을 형님, 저보다 뜻이 깊고 진중한 군자의 표현에 닿으려 굽이굽이 격랑 이는 편지를 띄웁니다. 뜻은 같으나 몸이 같지 않음의 비애를 이리도 한합니다. 대장부 한 세상이 광풍에 찢기는 돛폭 같습니다.”
그의 서신을 품에 안고 울지 않으려 북쪽 하늘을 응시한다. 갈매기 떼가 한 하늘을 이등분하며 다시 전하지 못할 말을 물고 섬 쪽으로 가라앉는다. 황혼이 마지막 기운을 동백숲으로 쏟아 붓는다. 내 기어이 오늘 밤엔 울혈의 사연 밀어 올리는 저 동백의 숨은 개화를 엿보리라. 우련한 달빛 등지고 붉은 꽃눈을 닮은 처사 하나가 복성재로 접어든다. 사랑하는 아우여, 부디 자중자애 하기를….
낮에는 창대와 더불어 물고기를 잡았다. 청어가 대량으로 잡혔다. 청어의 종을 알아보기 위해 내부를 해부하고 등뼈의 수를 헤아렸다. 창대가 내게 53마디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조선의 학문풍토를 생각하면 이런 시도를 한다는 것이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魚譜를 완성하여 후세의 선비에게 물려줄 작정이다. 후세의 선비가 나의 뜻을 알아내고 내용을 보다 훌륭하게 다듬어 이를 치병, 이용, 이재를 따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 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청어 한 마리를 해부해 놓고 척추 뼈를 헤아리다 생각한다. 행복한 저 청어의 죽음과 포박된 나의 생을 맞바꿀 수 있다면…. 나 죽어 유골인들 헤아려 줄 이 있을까마는 천년을 꿰뚫을 미물의 뼈로 一言을 새긴다.
다시, 나는 복성재에 올라 키 낮은 지붕들을 바라본다. 나를 품고 다독여야 할 이 옹박한 섬에서 내가 물고기의 등뼈처럼 휘어질 동안 또 몇 차례 광풍이 불고 손바닥만 한 마을이 후유증으로 술렁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소리도 없이 잦아들 생의 흔적들이 두렵다. 두려운 밤마다 어보를 꺼내 펴본다. 이름 없는 어족들의 계보를 캐는 일이 가뭇없는 날들의 행적을 훑는 일에 다름 아님을 자위해 본다. 피와 땀을 오로지 여기에 쏟아 부어 손암의 지난한 일대기를 완성할 것이다.
손암의 그림자가 내게서 서서히 풀려남을 본다. 자유로운 창공을 훨훨 나는 한 마리 새처럼, 바다의 격랑과 한 구비가 되어…. 옛 사람들은 새가 변해서 조개가 된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化生을 하는 생물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들은 적어도 행복한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행복한 죽음을 꿈꾸어 본 적이 있으므로 이승에서 하늘의 이치에 닿는 비밀을 캔다. 대장부의 뜻이 목구비를 넘는 만조의 심중에 가물가물 떠밀려온 섬 하나가 화생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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