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다음 날 / 김애자
그립고 아쉬운 것이 있어 비 내립니다. 실낱같은 외줄에 몸 기대고 있다가 지상에 내린 첫날, 깊어진 만큼 남아 있는 상처를 씻으라고 비 오시는가 봅니다. 서걱서걱한 가슴을 쓸어안고 문을 열어 첫 공기를 훑습니다. 퇴각 되어야 할 시간 속에 피어나야 할 무엇이 있는가 봅니다. 마른 기억들이 빗속에 떠다닙니다.
시간 속에 길이 있다 하셨지요. 한 몸인 양 인연의 옷을 입었던 그 순간들이 서러움 속에서 너울거립니다. 고통이라 여겼던 숱한 사연들도 이제는 슬프고도 아릿한 기억으로 허공에 매달리겠지요. 언젠가는 그대 없는 첫날을 맞으리라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 쉬 손을 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잠결엔들 꿈결엔들 한차례 불었던 바람이 뜨거웠던 한때를 식혀버렸습니다. 아직은 첫날이니 시간 속 길에 의지하지 않고 허둥대는 나를 용서하십시오.
빗줄기와 같이 울지는 않겠습니다. 담담하고 건조하게 떠나보내려 합니다. 가슴에 남아 있는 낡은 잔해들은 시간이 저물어 대지의 어디쯤 눈물 되어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지요. 젖은 어둠 속에서 옷깃을 여미며 돌아가야 할 길을 찾기도 하겠지요. 스멀스멀 외로움이 발밑에 깔리어 더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마 그렇다 해도 인습의 옷을 벗어버리겠습니다. 파도가 파도를 밀며 오는 것처럼 나 등 돌린 그대 반대편에 서겠습니다.
우리 둘이 하나였을 때 바라보았던 사물들은 더는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공간과 시간들도 그대와 함께 떠났습니다. 이 육신으로 태어나 그대를 만난 처음 떨림은 천 배나 깊고 애틋해졌지만, 의식의 소리에 귀 기울여서는 내가 숨 쉴 수가 없습니다. 거대한 낯선 도시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먹먹한 가슴을 안고 일종의 시련을 견딥니다.
밥을 입으로 넣습니다. 삼키기 전에 또 입으로 가져갑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 공허한 배를 채웁니다. 설거지를 합니다. 쓰지 않은 그릇들도 물속으로 넣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는 내 영혼을 가져갑니다. 순서 없이 청소기를 밉니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청소기가 가는 길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아직 깨끗한 옷가지를 세탁기로 모읍니다. 세제를 넣고 버튼을 누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들리는 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욕조 가득 물을 받아 몸을 담습니다.
뜨거운 물이 가슴에 꽂힌 바늘의 존재를 확인시켜 줍니다. 눈물은 아닙니다. 얼굴에 가득한 물기는 눈물이 아닙니다. 견디기 위한 몸짓입니다.
잠깐 마당에 나갔다 들어옵니다. 아무래도 종일 비가 내릴 모양입니다. 햇볕에 말리려고 널어둔 솔방울이 보였지만 외면해 버립니다. 한 번 밤이 오고 갔는데 세상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책을 펴고 활자를 확인합니다. 이상합니다. 내용은 파악하지 못했는데 책장은 몇 장 넘깁니다. 머릿속에 감정의 회로가 멈춘 몸이 습관이 된 일상생활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음악을 틉니다. 온전히 그대를 향해 열려있던 시간이 음악과 함께 영상이 되어 찾아옵니다. 한 컷으로 넘어가는 영상은 여전히 밝은 빛으로 반짝입니다. 하지만 영롱하게 빛을 내는 기억은 금방 길 위에 슬픔으로 사라집니다. 음악을 끕니다.
적요는 태우지 못한 열정의 미련을 기웃거리게 합니다. 전화기를 들었다가 천천히 내려놓습니다. 그대 향해 가는 손길을 거둡니다.
찻잔에 물을 채웁니다. 네 번째 차를 처음인 양 마십니다. 잠깐 바늘이 움직였는지 낮지만 깊은 숨을 토합니다. 거실에 화초가 시들합니다. 내 눈이 말라 있어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요. 살아 있는 것에 마음 주는 일이 기껏 촉촉하게 적셔주는 것인데, 나는 왜 그것이 어설플까요. 이탈하고 만 사랑을 돌아보며 물을 받아 화초에 양껏 넣어줍니다.
물을 먹고 싱그러워지는 화초처럼 나도 그것을 원했습니다. 팍팍한 가슴이 아니라 깊고 푸른 마음을 기대했습니다. 언젠가는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라도 다디단 말을 해주길 흔들고 보챘습니다. 달이 뜨면 가슴에도 덩달아 달 떠 바람이 흔든 문고리에도 속절없이 기다림에 설레었습니다. 기다리던 시간까지도 아끼며 아꼈음을 고백합니다.
다음 날, 또 다음 날, 다음 날, 그 다음 날……. 가슴에 꽂힌 바늘이 하나씩 빠지겠지요. 지금은 태풍이 대지를 휩쓸고 지나간 듯 신음하지만 한없이 평온한 날 오겠지요. 서러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미움도 너울너울 바람에 실려 왔다 가겠지요. 그대와 멀어지는 거리만큼 세월은 흐르고 인연의 긴긴 끈도 삭고 삭아 무심의 그날이 오겠지요. 그리하여 닫혔던 가슴을 새롭게 열게 되는 그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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