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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론

수필은 생활의 도구다 / 홍억선

에세이향기 2023. 5. 6. 07:49

수필은 생활의 도구다 / 홍억선



 
 


 
 


 
 


 수필은 생활문학이다. 삶의 이야기다. 수필은 순수문학이니 본격문학이니 하는 범주에 가깝지 않다. 수필은 시처럼, 소설처럼 그 본질을 순수의 정수, 완미의 세계에 두지 않는다. 선지자적 예언으로 미래를 추동하는 시와 구별되고, 소설처럼 개연성 있는 허구로 현재를 창작하는 일과 다른 길을 간다. 수필은 우리들 삶의 기억들을 불러와 현재에서 해석한다. 그것이 반성이 되든, 에너지가 되든 미래에 적용해 보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수필은 우리의 삶에 이용하고 한층 더 후생하게 하는 삶의 도구다. 삶의 지렛대이다.
 지금은 누가 무어라 해도 수필의 시대이다. 수필 쓰는 사람이 자력으로 판을 그렇게 키운 것은 아니다.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다. 시대 흐름이 세상의 일들을 풀어서 설명하는 산문의 시대를 만들어 놓았고, 수필에게 그 역할을 맡겨 놓았다. 이 급변하는 시대에 수필의 효용성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또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 지금은 수필이 필요한 시대이다.
 
 수필은 표출이다
문학이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글을 읽을 독자는 줄지어서 기다리는데 글을 생산해 내는 문인은 그리 많지 않던 때의 이야기다. 아침 드라마를 보기 위해 눈을 뜨자마자 텔레비전을 켜는 요즘의 세태처럼 감질나게 몇 줄 안 되는 신문 연재소설이 궁금해서 대문 앞을 기다리며 서성이던 때이기도 했다. 단발머리 소녀들은 한결 같이 가슴에 한 권의 시집을 안고 다니던 그런 때였다. 나 역시 안톤 슈낙의 산문집을 읽으며 어슴푸레 인간의 존재의식을 탐색하였고, 안병욱의 에세이 몇 편의 영향을 받아 ‘인간 상록수’가 되고자 꿈을 꾸었으며, 이어령의 ‘폭포와 분수’를 읽으면서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깨우친 바 있다. 그때의 문인들은 시대를 앞서 가르치는 선지자였고, 꿈을 열어가는 계몽가였다. 그들의 문학은 스스로 나를 드러내기보다 너에게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고자 하는 이타(利他)의 도구로 쓰였다.
 세상이 바뀌었다. 특히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학판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다. 우선 누구나 문인이 되는 세상이 왔다. 도서관이나 문화센터에서는 글공부를 하는 사람으로 북적였고, 그들은 대부분 시인이 되고, 수필가가 되었다. 수필가만 해도 무려 1만이 넘는 시대가 되었다.
문인의 양적 팽창이 곧 문학의 질적 저하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수의 증가와 더불어 다양한 내용을 가진 문인의 출현이 문학의 폭을 넓혔다. 단순한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정보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우리의 사회구조는 복잡해지고 전문화되어 갔다. 너와 내가 하는 일이 다르니 소통이 필요했고, 나를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해 생각과 말이 많아졌다. 더구나 작금의 가장 큰 트렌드는 표현의 욕구, 표출의 욕구가 넘쳐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수필가가 되겠다고 글공부를 시작한 어느 습작생의 첫 문장은 이렇게 거칠었다. “모든 가족의 부양을 짐 지고 있는 나의 지친 육신에 암이 찾아왔다. 암은 드디어 내가 당당하게 고통에서 해방될 핑곗거리를 주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썼다. “하루아침에 세 남자를 얻었다. 지나간 아픔을 지우려고 남편과 두 아들은 그렇게 나에게로 왔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고백했다. “가난한 신학 대학생의 아내는 모든 것이 궁핍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 위해, 남편에게 책을 사주기 위해 나는 상금이 걸린 백일장에 나가 용돈을 벌었다.” 이전에는 없었던 과감하고도 신선한 표출이었다. 시대 흐름이 이렇게 문학의 내용을 바꾸어 가고 있다. 이들은 지금 문단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작가가 되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근간에 발간된 어느 수필집 ‘1478’의 작가는 느닷없이 아내와 사별한 퇴직공무원이다. ‘1478’이라는 암호 같은 숫자는 아내가 떠나간 지 1478일이 지났다는 뜻이고, 글의 편편들은 부재의 공간에서 겪었을 애절했던 삶의 자취를 천상으로 보내는 보고서였다. 또 다른 작품집 ‘빈들에 서다’의 작가는 출산하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절명한 딸의 신원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했다.
문학이란 무엇일까. 윗세대의 문인이 감동과 깨우침이라는 문학의 원론에 입각하여 우리들에게 지식과 지혜로서 삶의 가치를 교술하고, 권고하였다면 이제 토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각혈과 같은 표출의 욕구들이 수필의 내용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치료이고, 정화라 불리어도 우리 수필에게는 고무적이고 환영 받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료1) 어미, 비나리가 되려하다 / 김순향 
 
 아침만 해도 햇살이 보였다.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니 비가 내리더니 어느새 가지산 골바람을 타고 눈이 되어 창을 흔든다. 볕이 들다가 바람과 눈이 되어 내리는 날씨는 아들의 승가대학 졸업 날짜를 받아 든 내 마음을 꼭 닮았다.
 줄이 선 바지에 셔츠 곱게 다려 타이를 받쳐 매던 아들은 우리 집 대들보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친 후 중국에서, 대만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중국사를 공부한 아들은 국내 대학의 교수로 거론되고 있었고 좋은 곳에서 중매도 들어와서 어미로서의 핑크빛 꿈을 꾸고 있었다. 또한 음악을 좋아했던 녀석은 국립교향악단 패널이었고 곧잘 어미 귀에도 리시버를 꽂아주며 밤새워 클래식 음계를 오르내리게 했다. 
 몇 해 전, 잠시 귀국했던 큰아이가 스승과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며 상경했었다. 달포가 지났지만 연락이 없었고 휴대폰도 꺼져 있었다. 그러나 워낙 착실한 아이였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기에 두루두루 만나서 회포를 풀고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안한 마음을 애써 잠재웠다.
그해, 땡볕이 내리쬐던 칠월 스무 날, 우편함에 꽂혀 있던 편지 한통이 우리 부부를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발신지는 잘 알려진 사찰이었다. 서너 줄을 읽던 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팽그르르 하늘이 도는가 싶더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부모님 전상서, 오랫동안의 소망으로 많이 번민하였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하여 포교활동을 하며 좀 더 가치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달려간 절에서는 아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삼대가 적선을 하여야 가문에서 중이 나온다는 말과 갖은 소리로 우리를 회유하려고 하였으나 좀 채 돌아갈 기미가 없자 아들을 데리고 왔다. 저도 마음이 편치 않은 탓인지 그 당당하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가자는 말엔 완강히 거절하여 속수무책이었다. 살아오면서 이처럼 무력한 적은 없었다.
 절문을 내려오며 작은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밤인데도 천 리 길을 득달같이 달려왔다. 채 눈도 붙이지 못한 녀석을 재촉하여 큰 아들을 데리러 갔다. 끌고라도 오리라는 다부진 마음으로 갔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동생도 형을 한 번은 봐야하고 부모도 한 번은 더 봐야하지 않겠냐는 가족들의 거친 항변에 겨우 종무소로 데리고 왔다. 맙소사! 하룻밤 사이에 큰 아들은 삭발을 하고 행자 승복을 입고 있었다. 작은 아들은 울부짖었다.
 “부모님과 나는 형에게 도대체 무엇이냐?”
 “그런 큰일에 왜 의논 한 번 없었느냐?”
 죄인 닦달하듯 몰아붙이는 동생에게 한마디도 못하는 큰 녀석과 흥분을 삼키지 못하는 작은 녀석을 보는 가슴은 아리다 못해 짓이겨졌다.
 대만에 있는 짐을 가져와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책은 이미 대만대학에 기증을 했고 옷이랑 소지품은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왔다고 했다. 아까웠다. 돈만 생기면 책을 사는 녀석이기에 내가 중국에 갔을 때도, 대만에 갔을 때도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네 책과 집에 있는 책을 보태서 도서관을 차리자며 농을 하고 왔는데 미련 없이 훌훌 털고 온 것을 우리는 눈치 채지 못했다. 세상 무엇보다 책을 아끼던 아들이었기에 이미 가족들의 만류도 소용없음을 알았다.
 절에 들어 온지 한 달 남짓인데 행자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고왔던 손이 군데군데 헤지고 습진이 돋아났다. 그 엄격한 군율도 사찰의 생활지침에서 가져왔다고 했으니 계를 받지 않은 행자승의 고초는 무슨 말로 대변하랴. 수행이란 이름으로 인내를 배우는 과정이라고 다독이며 하루를 보내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남편은 자식도 내 것이 아니라 세상에 와서 빌려 쓰는 것이라고 나를 달랬다. 내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알고 살아 온 것이 죄가 되어 이리도 아프다. 돌아오는 차 속에선 쓰린 속 감춘 채 속울음만 삼키는 남편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목 놓아 울었다.
 아들의 행자 승 생활이 끝나갈 즈음 우리는 이사를 했다. 삼십 년이나 정들었던 집이다. 승복을 입은 아들을 본집에 들일 수 없어서 이사를 했지만 묵은 정을 떼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었다. 사는 터를 옮겼어도 친척과 친구들은 큰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집안의 종손인 만큼 기대도 컸기에 그들의 궁금함은 당연한 것이어서 인도에, 또는 대만에 있다고도 했다. 아직도 출가를 했다는 말을 못하고 나는 여전히 여러 모임에 참석을 하지 않아 오해를 받기도 한다.
 신새벽이면 멀기만 한 불혹의 살점 하나로 나는 명치부터 아린다. 특히 삭풍 부는 동지섣달에는 베란다에 서서 새벽 버스에 눈을 박으며 중얼거린다. 저 버스만 집어타면 늙은 햇중을 볼 수 있는데, 산중 얼음물에 마음 베이지는 않았는지, 살 에는 새벽예불에 두 귀는 무사한지, 눈도 귀도 먹먹해진 어미는 길에다 안부를 묻는다.
 그 애물단지가 오랜만에 세상 집에를 왔다. 귀가한 승복을 다림질 하는 아린 모정이 회색장삼 위로 방울방울 번진다. 나는 긴 시간 챙겨주지 못한 밥상을 차린다. 채식으로 허약해졌을 속을 다스리려고 등심과 낙엽살, 제비추리도 넘치도록 굽는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대던 모습에 얼마나 흐뭇해했던 지난날인가, 그러나 줄어 든 것은 채소 반찬과 김 한 쟁반이다. 먹성도 입성도 이미 속가를 벗어나 있다. 오래 머물지도 못하고 등짝엔 바랑 가득 어미 눈물만 지고 떠난다. 시큰거리는 것은 저도 매한가진지 한 번 쯤 돌아보련만 끝내 뒤통수만 남긴다. 부모가 사력을 다해 말리던 그 길을 타고 난 제 길처럼 잘도 가지만 어미는 아직까지도 미련에 통째로 젖어 허우적댄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내가 중 어미가 되리라 상상이나 했던가? 잦아드는 햇살로 나의 삶도 한 뼘 남짓 남았을 뿐 그리 길지 않음을 안다. 이제 젖은 마음 훌훌 꺼내어 걸어본다. 바짝 말라지긴 애당 초 그른 일이지만 시나브로 꾸덕꾸덕 해질 날 기다린다. 아들의 졸업식에도 동참하여 축하해주리라. 꺼진 햇불이어도 자식은 가슴에 담아야 한다. 나는 법랍이 낮은 아들의 성불을 위해 기꺼이 비나리가 될 것이다.
 
 수필은 설득이다
 사람의 몸짓 하나, 말 한 마디는 설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문화라고 하는 것, 그림, 노래, 춤이라고 하는 예술, 시, 소설, 수필의 행위들이 설득 아닌 것이 있을까.
 글쓰기의 시작은 표출이고, 그 끝은 설득이다. 표출에서 설득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화, 형상화라고 한다. 쉽게 공감이라고 한다. 예술이 되게 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이 문학성이나 예술성을 얻기 위해서는 시에서처럼 날카로운 창끝이나 예리하게 베어지는 칼날의 순간적인 감각성을 굳이 품을 필요는 없다. 역사, 심리, 철학 등으로 소설을 축조하는 종합건축가의 특별한 자질을 배울 필요도 없다.
 지난 주말 몇 문우들과 마산 시가지 뒷산인 팔용산에 올랐다. 해발 300여 미터의 아담한 계곡길을 오르는데 천 개의 돌탑이 쌓여 있었다. 시청 공무원인 이삼용씨가 25년 동안 주말마다 오르내리면서 쌓아올린 1000여 개의 돌탑이었다.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의 뜻밖의 신선함이었다. 감동이었고 그 감동이 설득적이었다. 무엇인가 의미하는 바가 다양했다.
 수필은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수필은 삶의 이야기다. 등단한 수필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글로써 자신을 표출하고 그 표출이 설득력을 가지면 그 글은 이미 수필이다. 하긴 굳이 수필이면 어떠하고 또 수필이 아니면 어떠한가.
 그러나 기왕에 수필가라는 이름을 달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지금의 수필 시대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의 문화예술 중에 삶의 이야기를 수필만큼 직접적으로, 진실 되게, 리얼하게 삶을 표현하는 도구는 없다. 수필에서 문학성이니 예술성이니 따져가며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작하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갖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자유 또는 혼돈의 시대다. 해체와 결합이 전방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개인과 사회를 수렴하는 도구로서 수필의 역할이 큰 지금이다.  
 
 자료2) 하늘나라 네 시어머니가 '문자'를 안 받아/손현숙
 
 내게는 핸드폰 두 대가 있다. 한 대는 내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나라에 계신 시어머님 것이다.
내가 시부모님께 핸드폰을 사드린 건 2년 전. 두 분의 결혼기념일에 커플 핸드폰을 사드렸다. 문자기능을 알려 드리자 두 분은 며칠 동안 끙끙대시더니 서로 문자도 나누시게 되었다. 
 
그러던 올 3월, 시어머님이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셔서 유품 가운데 핸드폰을 내가 보관하게 되었다. 그러고 한 달 정도 지날 무렵. 아버님이 아파트 경비 일을 보시러 나가신 후, '띵동'하고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어머님 것이었다.
"여보, 오늘 ‘야간조’니까 저녁 어멈이랑 맛있게 드시구려."
순간 난 너무 놀랐다. 아버님이 혹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치매증상이 오신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함이 몰려왔다.
그날 밤 또 문자가 날아왔다.
"여보, 날이 추운데 이불 덮고 잘 자구려. 사랑하오."
남편과 나는 그 문자를 보며 눈물을 흘렸고, 남편은 좀 더 지켜보자고 했다.
아버님은 그 후 "김 여사! 비 오는데 우산 가지고  마중 가려는데 몇 시에 갈까요? 아니지. 내가 미친 것 같소. 보고 싶네"라는 문자를 끝으로 한동안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셨다.
그 얼마 후 내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어미야, 오늘 월급날인데 필요한 거 있니?
있으면 문자 보내거라."
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네. 아버님. 동태 2마리 만 사오세요" 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날 저녁 우리 식구는 아버님이 사 오신 동태로 매운탕을 끊인 후 소주 한 잔과 함께 아버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아직도 네 시어미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 그냥 네 어머니랑 했던 대로 문자를 보낸 거란다. 답장이 안 오더라.  그제야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알았다.
모두들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아 내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던 것도 안다.
미안하다."
그날 이후, 아버님은 다시 어머님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지 않으신다. 하지만, 요즘은 나에게 문자를 보내신다.
지금 나도 아버님께 문자를 보냈다.
"아버님. 빨래하려고 하는데  아버님 속옷은 어디다 숨겨 두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