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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론

수필의 화자시학/안성수

에세이향기 2023. 7. 9. 08:54

새로 쓰는 수필론
수필의 화자시학

안 성 수


1. 여는 말


수필의 화자는 어떻게 존재하며 그 기능을 수행할까? 이 문제는 곧 수필의 정체성과 연결된 문제로서 작가들이 글을 쓸 때마다 한 번씩 반문해 보아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만큼 화자는 수필의 구조와 소통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그 동안 화자 연구는 소설 서사의 핵심과제가 되어 왔다. 소설의 화자 연구는 구조주의 시대에 이르러 개념의 구체화 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견고한 논리를 확보하게 되었지만, 전통소설론에서는 소재를 포착하는 자와 그것을 문학적 이야기로 조직하여 들려주는 자의 기능을 통합하여 사용해 왔다. 이를테면, 전통적 화자는 구조시학자들이 말하는 초점화자와 서술자의 두 가지 기능을 분별없이 사용함으로써 역할과 기능의 추상적 통합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기능은 헨리 제임스가 중심의식이라는 말로 서술의 초점을 언급한 이래, 소설 서사의 소통체계를 이루는 핵심원리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화자의 개념은 브룩스와 워렌이 말한 “서술의 초점”이라고 언급한 두 가지 기능 속에서 발견된다.
그러면 수필에서의 화자는 어떤 존재일까? 소설에서는 관습적으로 작가가 아닌 제3자를 화자로 내세우는 데 비해, 수필은 작가 자신이 화자임을 드러내 놓고 자임한다. 따라서 수필은 작가가 화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국이라는 점에서 소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차이점을 보여 준다. 이 글은 바로 그런 장르적 정체성의 관점에서 수필과 소설의 화자 기능과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데 목표를 두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차이점을 중심으로 수필과 소설이 각자의 견고한 서사미학을 구축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수필은 본성적으로 수필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소통체계와 미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 초점과 서술의 개념


화자의 개념 속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들어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브룩스가 말한 “서술의 초점(the focus of narration)”이란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를테면, 서술과 초점, 혹은 서술자와 초점자라는 두 가지 기능과 역할 속에 화자의 기능이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초점은 화자가 이야기를 인식하는 관점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관점 속에는 소재를 바라보는 인식자의 시각과 거리, 위치, 방법 등을 함축하고 있다. 주어진 소재의 세계를 어느 누군가의 관점을 포커스로 하여 제한적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 때 관점의 의미 속에는 육하원칙인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유하고 있다. ‘누가?’는 이야기 인식자로서의 초점의 존재와 주체를 지시하는 말이며, ‘언제?’와 ‘어디서?’는 인식자의 시공간적 위치와 거리를, ‘무엇을?’은 인식 내용의 주제와 지향성을, ‘왜?’는 인식자의 심미적이고 철학적인 의도와 관점을, ‘어떻게?’는 인식의 방법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비해, 서술의 개념 속에는 초점자가 과거에 인식한 내용(이야기)을 누군가의 목소리와 어조를 빌려 어떻게 전달하는가의 의미가 내재해 있다. 이 또한 육하원칙과 연결시켜 설명할 수 있는데, ‘누가?’는 서술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지시하고, ‘언제?’와 ‘어디서?’는 서술의 시점과 공간을, ‘무엇을?’은 서술의 내용을, ‘왜?’는 서술의 심미적이고 철학적인 이유를, 그리고 ‘어떻게?’는 서술의 어조와 방법과 거리 등을 함축한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소재로서의 이야기를 문학적 이야기로 인식하기 위한 초점자의 기능과 그것을 다시 문학적 이야기와 문장으로 바꾸어 독자에게 전달하는 서술자의 기능 사이에는 시공간적이고 심미적 거리가 존재함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양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식 내용과 서술 내용 사이에는 동일성이나 유사성뿐만 아니라, 이질성이나 차이성까지도 개입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초점자가 인식한 것(내용이나 심미적 태도 등)과 서술자가 전달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소재로서의 이야기를 인식하는 주체인 초점자와 그것을 문학적 이야기로 바꾸어 전달하는 서술자 사이에는 심미적 거리와 간극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식자의 행위와 서술자의 행위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임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소설론에서는 이 두 가지 기능을 하나로 통합하여 무분별하게 사용해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두 가지 기능을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여 사용하기 위해 화자의 개념을 초점화자(focalizer)와 서술화자(narrator)로 구별하여 쓰고자 한다. 전자는 구조시학자들의 용어이고 후자는 초점화자와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 서술자를 지시한다. 이렇게 할 경우, 전통적 개념의 화자가 지니고 있는 서술과 초점의 두 기능을 반영하면서도 구조시학자들이 말하는 초점화의 기능과 서술의 기능을 구별하여 적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초점화자는 소재 발견 당시 작가의 관점과 의식 중심을 지칭하는 개념이라면, 서술화자는 내포작가의 지시를 받아 서술 행위를 이끄는 전달자를 이르는 개념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전자와 후자를 동일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만큼 이 양자의 활동 시공간을 비롯한 심미적 상황 또한 달라졌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점화자의 인식행위와 서술화자의 전달행위는 하나의 간극으로 연결된 소통체계 속에서 그 역할과 기능이 분명하게 주어진다.
수필에서 이러한 개념의 틀을 사용할 경우, 장르적 정체성이 보다 분명하게 강조되는 효과를 누린다. 이를테면, 수필은 작가가 항상 주체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글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타장르와 구별된다. 비록, 작가 자신이 달라진 시공과 심미적 환경 속에서 초점화자와 서술화자가 되어 이중적 거리를 만들어 내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한 주체로서의 성찰과 고백을 심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이러한 특수한 소통체계 속에서 수필의 사실성은 한층 강조되거나 극대화되는 미학적 속성을 보인다. 수필이 자기 성찰의 문학인 동시에 사실 고백의 문학이 될 수 있는 것도 이런 인식과 서술 사이의 이중적 간극 장치가 만들어 내는 미적 소통의 결과로 보인다.


3. 화자의 유형과 기능


이제, 수필의 화자 유형과 기능을 언급하기 전에, 비교의 관점에서 소설 서사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다. 전통소설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화자 유형에는 브룩스와 워렌이 주장한 것처럼 1인칭과 3인칭이 있다. 1인칭 화자는 다시 주인물과 관찰자로 나뉘는데, 주인물에게는 내면 묘사의 능력이 주어지고 관찰자에게는 객관적인 외적 관찰의 능력만이 주어진다. 3인칭 화자는 전지적 작가와 작가 관찰자로 나뉘는데, 전자에게는 전지전능한 신적인 능력이 주어지고, 후자에게는 인간적 수준의 외적 관찰 기능만 부여된다. 여기에 20세기 중후반 이후, 2인칭 화자와 3인칭 제한적 전지 화자가 추가되면서 보다 구체화된 화자의 유형론으로 발전한다. 전자에게는 동일 공간에 함께 거주했거나 동일체험자로서의 목격자나 증언자의 역할이 주어지고, 후자에게는 주인물 한 사람에게만 전지전능한 전지적 화자의 인식과 서술의 기능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화자의 개념 속에는 앞서의 언급처럼 여전히 초점화의 기능과 서술의 기능이 혼재해 있다. 다시 말하면, 화자를 통해서 이 두 가지 기능을 마치 한 사람이 두 가지 역할을 동시적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인식한다. 브룩스와 워렌이 초점화의 기능과 서술의 기능을 통합하여 “서술의 초점”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나, 이것은 분명 비과학적 인식의 결과로 보인다.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라고 해도 소재를 발견하자마자 그것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여 독자에게 동시적으로 제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작가가 글감을 발견하여 인식하는 초점화의 시공간과 그것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여 문학적 문장과 문체로 전달하는 서술의 시공간 사이에는 일종의 간극(間隙)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초점화의 행위와 서술의 행위가 동시적으로 전개될 수 없다는 것은 전지적 작가를 제외한 모든 화자가 1인2역을 동시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 화자의 논리는 그 나름의 한계와 모순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만 특별하게 관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전지적 작가화자를 제외하고는 어떤 화자도 초점화와 서술을 동시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스포츠 중계방송처럼 동시중계가 불가능한 시간 예술로서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뒤에 문학 언어로 재구성하여 전달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특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화자의 두 가지 기능을 하나로 묶어 설명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구조시학자들은 이 점에 대하여 명쾌한 논리를 제공한다. S. 리몬 케넌이나 S. 채트먼, 제럴드 프랭스 같은 이론가들은 초점화와 서술을 분리시켜 소설의 화자시학을 설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들은 초점화자를 체험의 주체로, 서술자를 전달의 주체로 명명함으로써 역시 전지적 화자를 제외한 모든 화자들이 2인2역을 수행함을 인정한다. 예컨대, 초점화자와 서술화자의 기능과 역할이 시공간적이고 심리적인 간극에 의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 1인칭 회상풍의 이야기이다. ‘과거의 나’가 체험한 사실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여 ‘현재의 나’가 서술을 통해 독자에게 들려줄 경우, ‘과거의 나’는 초점화자로서 기능하고 ‘현재의 나’는 서술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구조시학자들은 초점화 유형을 초점화자의 존재 위치에 따라 외적초점화와 내적초점화, 영초점화로 구별한다. 외적초점화는 작중인물이 아닌 이야기 밖의 제3자가 초점화자가 되는 경우이며, 내적초점화는 이야기 속의 작중인물 중의 한 사람이 초점화자가 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영초점화는 전지적 화자가 초점화와 서술자의 역할을 동시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초점화의 지속 정도에 따라서 초점화자가 일관되게 고정되어 있는 고정초점화와 두 사람의 초점화자가 교대로 나타나는 가변초점화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초점화자의 수에 따라 한 명의 초점화자가 나타나는 단수초점화와 몇 명의 초점화자가 교대로 나타나는 복수초점화 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수필에서는 이러한 초점화자와 서술화자의 분리 현상이 어떻게 나타날까? 물론 수필에서도 이 두 가지 현상은 1인칭 회상풍의 소설과 유사하게 나타난다. 우선, 소설은 1인칭 회상풍의 이야기에서도 초점화자는 ‘과거의 나’가 되고 서술화자는 ‘현재의 나’가 되지만, 작가 자신이 아니라 허구적 인물로 규정된다. 이에 비해, 수필은 초점화자와 서술화자가 모두 작가 자신의 의식적 분신으로 공공연하게 천명된다. 수필에서는 작가가 과거의 체험 속에서 건져 올린 글감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조직하고 그 이야기의 체험주체가 바로 작가 자신의 의식적 분신(제2의 자아)임을 드러내 놓는 비전환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필작가가 자신의 체험 속에서 건져 올린 글감을 가지고 작품을 쓴다고 해도 시공간적, 혹은 심미적 간극이 개입된다는 점에서 앞의 초점화자와 뒤의 서술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동일인으로 볼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작가가 이야기를 최초로 발견하여 초점화를 통해 인식한 내용과 그 후, 그것을 다시 문학적 이야기로 재구성하여 서술자가 독자에게 들려주기 위해 서술한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글감을 문학적 이야기로 재구성하여 서술하는 과정에서 실제작가를 대신한 이상적인 작가상인 내포작가(implied author)가 글쓰기에 참여한다는 점에서도 글감 채취 현장의 초점화자(실제작가)와 서술 주체인 내포작가를 동일인으로 볼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따라서 수필은 작가 자신의 체험적 글감을 가지고, 작가가 심리적으로 내세운 이상적 작가상인 내포작가에 의해 이상적 독자상인 내포독자(implied reader)를 대상으로 쓰여지는 문학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수필은 실제작가의 초점화 작용에 의해 포착된 체험적 진실이 그가 내세운 이상적 작가상인 내포작가의 통제를 받는 서술화자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수필은 실제작가가 초점화를 통해 찾아낸 체험적 진실이 이상적인 작가상인 내포작가에 의해 다시 한 번 클로즈업되는 과정을 통해 체험적 진실의 순도를 극대화시키는 특이한 소통체계를 구축한다.


4. 서술의 초점과 거리 미학


그러면, 작가는 초점화자와 서술화자를 활용하여 어떻게 대상과 독자 사이에서 심미적 거리를 조절할까. 본래, 영화에서는 포커스의 개념이 명쾌하게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만 소설에서는 대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화자의 위치와 대상에 대한 인식의 정도만을 심미적 거리 개념에 포함시켜 보여 준다.
이러한 서술 시점의 위치와 인식 정도를 활용한 거리 조절 행위는 소설미학이나 수필미학에서 두 가지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하나는 어떤 이야기를 문학적 이야기로 바꾸어서 효과적(감동적)으로 들려주기 위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주제를 효율적(미학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전략과 관계된다. 문학적 이야기와 일상적 이야기가 다른 점은 전자가 바로 예술적 감동을 위한 특별한 서술전략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일상적 이야기가 주어진 그대로의 이른바 가공되지 않은 생(生)소재로서의 이야기라면, 문학적 이야기는 그 생소재를 예술적으로 가공하여 특별한 미적 감동을 목표로 재구성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설정한 미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서술화자를 통한 심미적 거리의 조절은 필수적이다. 이별의 주제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이별의 정서로 형상화해 내는 특수한 심미적 거리가 필요하고, 만남의 기쁨을 감동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구조와 주제의 작용을 적절하게 전달해 줄 수 있는 심리 조절장치가 필요한데 이 때 요청되는 것이 심미적 거리이다. 윤오영의 수필 「달밤」은 작가의 오감에 비친 도인 같은 노인의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극적 긴장감을 풍기는 간결한 대화를 도입하고 서정적인 달밤 풍경을 스케치하는데 이런 것들이 심미적 거리 조절에 동원되는 것이다.
문제는 심미적 거리 조절의 방법에 있다. 소설에서 활용하고 있는 거리 조절방식은 문체와 분위기 등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로 화자의 위치와 인식 및 관찰 방법에 의해서 수행된다. 우선, 서술화자의 존재 위치와 인식능력에 따라 내부시점과 외부시점으로 구별한다. 내부시점은 작중인물의 내면심리를 보여 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외부시점은 객관적 외부관찰에 머문다. 물론, 내부시점도 서술화자의 인간적 인식능력의 범주 안에서만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전지적 작가의 인식능력과는 구별된다. 작중인물의 내부 심리를 섬세하게 보여 주고자 한다면 내부시점이 유리하고, 외적관찰에 의한 정보 제한이 오히려 감동 창조에 유리하다면 외적관찰의 방법이 적절하다.
이와는 달리, 서술화자의 위치와 유형에 따라서 인물시점과 화자시점으로 나누기도 한다. 인물시점은 작중인물 중의 한 사람이 서술화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이고, 화자시점은 작중인물이 아닌 제3자가 서술화자가 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도 수필작가는 감동과 진실의 순도 증진에 목표를 맞추어 어떤 방식을 선택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수필은 1인칭 주인물 화자나 1인칭 관찰자 화자에 의해 전달된다. 작가가 자신의 체험을 글감으로 취하여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와 어조에 실어 전달한다는 점에서 수필은 기본적으로 1인칭 주인물이나 관찰자 화자에 의해 전달되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모든 수필이, 그리고 다양한 수필의 글감이 한결같이 1인칭 주인물 화자에 의해 전달됨으로써 거리 조절의 다양성이 결여될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자신의 직접체험을 이야기할 때는 1인칭 주인물 시점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보고 나서 간접체험의 형식으로 들려줄 때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 어울리지만, 문장의 함축성과 서술방법에 의해 얼마든지 심미적 거리를 조절할 수 있다. 오히려, 수필은 시적 속성인 언어의 함축적이고 내포성이 큰 산문어를 채택함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의 양이나 밀도, 속도 등을 조절하거나 상징과 비유 등을 활용하는 식으로 거리 조절이 가능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수필 문장이 문장의 맛과 멋을 강조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이 1인칭 문학이면서도 특수한 미적 효과와 감동을 창조할 수 있는 것도 이런 데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타자에 의한 간접체험을 소재로 한 경우에도 수필은 1인칭 화자를 구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액자 기법이 그 예인데, 내부이야기에는 2인칭이나 3칭으로 서술된 타자들의 이야기를 삽입시키고 바깥이야기에는 작가 자신이 1인칭 증언자나 목격자가 되어 주제를 수렴하는 식의 이중구조가 그것이다. 김소운의 「가난한 날들의 행복」이 이에 해당하는데, 여기서 작가는 세 쌍의 가난한 부부들의 행복한 경험담을 옴니버스 형태로 몽타주 한 뒤, 그것을 액자의 내화에 삽입하여 전달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런 경우에도, 수필작가가 유의해야 할 점은 액자의 주체는 3인칭 이야기로 서술되는 내부이야기를 작가 자신이 1인칭 화자가 되어 주제로 수렴시켜 형상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수필은 2인칭이나 3인칭을 동원할 수도 있으나 최종적인 주제 수렴자는 1인칭인 작가 자신이 될 때, 수필의 전통과 정체성을 잃지 않고 유지하게 된다.


5. 수필의 화자시학과 소통체계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화자는 텍스트의 소통체계 속에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실제작가가 자기의 체험 속에서 글감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보여 주는 초점화자의 역할이요, 다른 하나는 문학적으로 구조화한 텍스트를 언어를 매체로 하여 전달하는 서술화자의 역할이다. 이러한 화자의 두 가지 역할에 대해서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수필 텍스트 나름의 독특성을 보여 준다.
화자의 역할과 수필 텍스트의 소통과정을 연계시켜 보면, 수필 화자의 기능이 잘 드러난다. S. 채트먼이 정리한 ‘실제작가 내포작가 (서술자) (피화자) 내포독자 실제독자’로 이어지는 소통체계는 수필 텍스트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수필의 소통체계 속에서 실제작가는 실제독자와 짝을 이루는 첫 번째 층위로서 현실세계를 텍스트와 이어 주는 교량 역할을 한다. 루카치 식으로 말한다면, 모든 작가는 총체성이 깨어진 현실세계에 살면서 그것을 다시 복구하기를 갈망하는 이야기를 쓰는 자이다. 수필 창작과정에서 실제작가는 주로 자신의 체험 속에서 글감을 채취한 뒤 초점화자를 내세워 대상을 인식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아직 미적으로 형상화되지 않은 원소재로서의 이야기를 자신의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초점화하거나 객관적으로 초점화한다. 수필작품에서 주관적으로 초점화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경험을 글감으로 채택하는 경우이며, 객관적으로 초점화하는 경우는 타인의 이야기를 관찰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전자는 자신의 이야기이므로 내면 투시가 가능하고, 후자는 타인의 이야기이므로 소재의 차원에서는 일단 외면관찰의 태도를 보이지만, 그것을 주제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는 내부시점으로 전환하여 작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수렴시키는 경로를 밟게 된다.
내포작가는 내포독자와 짝을 이루어 소통 층위를 구축하는데 실제 창작의 차원에서 경험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내포작가는 모든 작가들이 창작과정에서 완벽한 작품을 꿈꾸며 창작에 임하게 하는 이상적인 작가상으로서 실제작가의 의식적 분신이다. 세상의 모든 작가는 창작의 현장에 들어가면 어느 한 순간도 완벽한 작품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이상적인 작품 창작의 욕망을 보인다. 이 과정에서 내포작가는 실제작가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창작의 주체로서 창작에 임한다. 그러므로 작품 창작에 임하는 실질적인 작가는 실제작가가 아니라 내포작가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의 소통체계에서 세 번째 층위의 주체인 서술자는 피화자를 대화의 상대자로 갖는다. 서술자는 서술행위의 주체로서 내포작가에 의해 심미적으로 조절된다. 소설에서 서술화자는 작가 자신이 아닌 허구적 존재로 규정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수필에서는 실제작가를 대신한 내포작가에 의해 조종되는 실제작가의 또 하나의 분신이다. 이 때 내포작가에 의해 조종되는 서술화자는 실제작가의 지배를 받는 초점화자의 국면과는 다른 시간적, 공간적, 심미적 수준에서의 거리와 간극을 함유한다. 수필에서 서술화자는 내포작가에 의해 이상적으로 고양된 창작현장에서의 실제작가를 대신한다.
네 번째 층위를 이끄는 피화자는 서술화자의 파트너로서 창작과정에서 전제되는 심미적 대화의 상대이다. 실제작가가 내세운 이상적인 작가상인 내포작가가 바람직한 텍스트의 소통을 욕망하며 내세우는 전달자가 서술화자라면, 그 서술화자가 전제하는 정신적 대화의 파트너가 피화자이다. 서술자는 피화자를 통하여 자기가 말하는 모든 의미작용을 완벽하게 수용하기를 꿈꾼다. 비록 그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욕망일지라도 그렇게 수행해 주기를 갈망하면서 서술 행위를 진행한다.
수필의 다섯 번째 소통 층위의 주체인 내포독자는 내포작가의 정신적, 심미적 파트너로서 이상적 독자상이다. 내포작가가 창작과정에서 완벽한 작품을 꿈꾸는 자라고 한다면, 내포독자는 내포작가가 전제하는 완전무결한 수용자로서의 독자상이다. 비록 그런 독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창작과정에서는 내포작가가 서술자를 통하여 전달하는 텍스트의 세계를 이상적으로 수용하기를 갈망한다. 수필에서 내포독자는 실제작가가 자신의 체험적 진실을 완벽하게 이해해 주기를 소망하는 작가의 문학적 고백의 심층적 수용자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수필의 여섯 번째 소통 층위의 주체는 실제독자이다. 실제독자는 내포독자의 텍스트 수용 결과를 현실 속으로 편입시켜 삶으로 승화시키는 주체가 된다. 이 과정에서는 실제 현실과 작품 현실 사이의 괴리와 거리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그 거리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수필세계가 보여 준 바람직한 성찰의 결과를 삶에 반영시키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실제독자가 독서를 통한 소통 결과를 삶에 연결시켜 고양시키는 과정이 바로 이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제작가와 실제독자는 자신의 바람직하지 않은 삶을 창조적 성찰과 창조적 독서를 통해 바람직한 세계로 인도하는 승화와 성숙의 기회를 맞게 된다. 그들은 이러한 문학적 소통과정을 통하여 인간적 성숙에 이르는 수행자가 된다. 특히, 수필은 작가 자신의 체험을 글감으로 하여 초점화자와 서술화자 간에 형성되는 성찰의 간극을 통해 작가 자신의 체험적 고백을 보다 깊이 있게 통찰함으로써 자의식과 내면의식을 심화시키는 수행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6. 닫는 말


종교적 수행이 교리에 따라 삶을 실천하는 자아실현의 방식이라면, 수필 창작은 문학 언어를 도구로 한 자기수행의 한 방식이다. 수필은 작가가 자신의 행동과 체험을 언어로 재구성하고 재조직하여 미학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수행이라는 점에서 여타 장르보다 비교 우위에 선다. 글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놓고 자신의 행동과 말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통하여 수필작가는 수필쓰기를 자신의 정신적 거울 닦기로 활용한다. 허구문학이 가상의 현실 속에서 진실 찾기에 매달린다면, 비허구문학인 수필은 작가의 실제 현실 속에 묻혀 있던 진실을 드러내어 고백한다.
이러한 문학적 진실 찾기의 과정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수필의 화자 역할이다. 수필의 화자 역시 초점화자와 서술화자로 분리되어 기능하지만, 전자가 작가 자신의 삶 속에 묻혀 있는 감동적인 글감을 포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면, 후자는 실제 체험을 예술적으로 재구성하여 미적 감동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미적 장치로서 기능한다. 바로 이 점에서 실제 현실과 미적 현실은 심미적 거리를 갖는다. 삶의 직접 제시가 글감의 수준이라면, 그것을 예술적으로 재조직하여 미적 감동과 승화의 힘을 농축시켜 놓은 것이 수필의 세계이다.
수필의 소통체계에서도 화자의 중요성은 결정적이다. 아무리 재미있고 유익한 글감을 발견했다고 해도 그것을 초점화자를 통하여 적절히 취사선택하지 못하거나, 서술화자를 통하여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면 감동의 힘과 승화의 힘은 약화되기 마련이다. 세상의 많은 지식인이나 철학자들이 모두 수필가나 문학가가 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문제는 문학적 형상화 능력이다. 물론, 이야기의 소재 찾기와 구조화 능력도 수필가가 향상시켜야 할 미적 덕목이 되지만, 어떤 문장과 문체를 이용하여 어떤 어조와 어법과 거리의식으로 어떻게 전달하는가의 문제야말로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조건이 된다. 이별의 아쉬움을 형상화한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극대화시켜 전달할 수 있는 심미적 거리가 필요하고, 사랑의 아픔을 주제로 한 이야기에는 그것을 독특한 미적 감동으로 극대화시켜 이끌어 낼 수 있는 미적 거리를 내포시켜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서술화자의 기능이다.
모든 이야기가 문학적 이야기가 될 수 없듯이, 또한 모든 문학적 이야기가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필의 이야기 또한 독특한 미적 감동의 구조와 방법을 함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조절하는 중요한 조절 방식의 하나가 바로 화자시학의 원리라는 점에서 작가들에게는 늘 중요한 탐구과제가 된다. 따라서 수필작가에게는 무엇을 들려주느냐 못지않게 그것을 어떻게 들려주느냐의 문제가 한층 예술적인 난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수필작가에게 화자시학은 수필 텍스트를 예술작품으로 소통시키는 미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문학적 소통의 한복판에 화자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