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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론

교술의 기록성과 문학의 형상화 /강돈묵

에세이향기 2023. 7. 9. 08:56

교술의 기록성과 문학의 형상화    

--김정화의 <가자미>

 

 

  흔히 수필을 교술 문학의 대표격으로 말한다. 이 교술은 ‘사실을 가르치거나 전달하기 위한 기술’, ‘대상이나 세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설명하는 문학 장르’ 쯤으로 사전류에서는 밝히고 있다. 신재기 교수는 <수필창작의 변증법적 방법>에서 ‘교(敎)는 정보를 알리는 거나 주장한다는 의미이고, 술(述)은 사실이나 경험을 서술한다.’는 뜻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수필은 문학의 형상화와 교술의 기록성이라는 상반된 두 세계를 변증법적으로 처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형상화와 기록성은 함께 어우러지기에 부담이 있어, 변증법적 처리라는 용어를 동원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수필문학이 추구해 가야 할 방향을 감지할 수 있다. 막연히 자신이 경험한 바를 기술하는 데에 멈춰서는 안 되고,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까지 찾아 형상화해야 함을 깨닫는다. 수필의 형식적 특징에는 예시단락과 일반화단락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싶다. 예시단락에서는 교술적 기록을, 일반화단락에서는 문학적 형상화의 기능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정화의 <가자미>는 교술의 극치이다. 더 뒤져도 이 이상은 나올 것이 없지 싶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독자에게 제공한다. 작가의 집필에 임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독자에게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차용한 기법은 비교와 대비이다.

  가자미를 이야기하기 위해 끌어들인 물고기는 넙치(광어)다. 두 물고기의 생김새로 독자에게 접근한다. ‘눈이 오른쪽으로 쏠린 가자미와 왼편으로 몰린 광어를 구분하고자 좌광우도라는 대중어까지 생겼다.’ 비슷하나 다른 면을 찾아 제시한다. 하지만 인간들은 늘 혼돈하여 쉽게 구분해내지 못한다. 그러니 다른 고기를 대어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아주 보잘 것 없는 미미한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도미, 고등어, 농어, 갈치, 대구, 아귀, 물메기 등이 엑스트라로 등장한다.

 이쯤 되었으면 이제 ‘가자미’만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가자미의 생김새의 가장 특이함은 눈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작가의 시각으로보다 옛사람의 지혜에서 나온 표현을 동원함으로써 동의를 구하고 있다. 비목어(比目魚), 반면어(反面魚)를 설명하며 넙치와의 연결을 도모한다. 넙치와 가자미가 한 몸이었다는 것을 상상해 내어 인간들의 별리를 비아냥한다. 결국 우리 인간은 가자미에게 비아냥 당해야 하는 존재이다. 작가의 상상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 많은 가자미의 별칭을 교술하며, 정약전이 ‘소접小鰈’이라 명명한 것을 작가는 나비 접 자를 붙여 ‘소접小蝶’으로 바꾸어 놓고, 낭만적인 상상에 빠진다. ‘물고기의 작은 나비’라는 것이다.

 이제 가자미 소개는 생태에 대한 것만 남았다. 뻘바닥에 붙박여 지내는 모습을 태생적으로 온유하고 심약한 존재로 표현한다. 갯지렁이나 새우를 삼키고도 무슨 큰 죄인이 된 듯 바닥을 긴다는 시각이다. 절대 가자미눈이라는 말로써 남에게 심통이나 부리는 고약한 물고기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가자미’의 교술은 마무리하고 문학성을 성취해야 한다. 지금까지 벌려온 글감으로 무언가 작가가 세상에 대고 할 이야기를 해야 한다.

 

   물고기를 문학 소재로 삼을 때 가자미만 한 것이 있을까 싶다. 문어처럼 이름자에 글월 문文자가 없어도, 오징어같이 먹물통을 지고 있지 않아도, 문학과 가자미의 인연은 깊다. 시인 백석은 그저 한없이 착하고 정다운 가재미라며 특히 친애하였다.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할 것 같다며 듬뿍 품어주었다. 오늘날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애송시가 되듯이 문인들께서 귀히 여겨주시니 어물전 인부들마저 작업 가자미를 ‘작가’라 불러주는 것이다. 뻘밭에 묻힌 삶도 견디다 보면 누군가 알아줄 날이 온다. 인생역전이 없다면 세상사 헛것이 아닌가.

   더 바짝 몸을 낮추어본다. 마른 잎이 땅에 떨어지고 나무 그림자도 길게 몸을 눕힌다. 때가 되면 지상의 모든 것이 아래로 엎드린다. 바닥의 삶이라도 어떤가. 생을 먼저 깨우쳤다고 위로하면 괜찮다. 이만하면 가히 됐다. -김정화의 <가자미>에서

 

   문어나 오징어처럼 문(文)과 가깝지 않아도 문인과 늘 교유하면서 산다는 작가의 시각은 상상의 극치이다. 그러면서도 몸을 최대한 낮추고 사는 가자미의 겸양에 화룡점정(畵龍點睛)한다.

 수필이 작가의 삶에 근거한 문학이라고 하여 안이한 태도로 임해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작가의 삶에 대한 표현이라 해서 체험을 그대로 적어내리는 것을 수필이라 하지 않는다. 그 체험은 비록 작가의 삶이라 해도 객관화하여 의미를 부여한 문학적 글감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삶에서 끄집어낸 단순한 글감은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겐 커다란 의미로 다가선 것이라도 그것이 제대로 해석이 되어 의미를 함유하지 못하면 그것은 아주 사소한 사적인 넋두리에 지나지 못한다.

 요즈음 대부분 작가들은 자신의 삶에서 글감을 취택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한 바를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는 자꾸만 전문화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자기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노력의 결과에서 얻어진 결과물이다. 수필가들도 다른 작가와 다른 나만의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여 활용할 필요가 있는 때가 되었다. 닥치는 대로 잡히는 대로 글을 다양하게 쓰는 것도 좋지만, 무엇인가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가 있어 그 안에서는 용기 있게 자신의 생각을 설파하는 작가가 요구되는 세상이다. <강돈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