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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론

수필의 서정성/방민

에세이향기 2024. 3. 8. 09:08

 

수필의 서정성/방민
 
   수필도 시처럼 서정을 담는다. 서정은 감정을 펼친다는 뜻이다. 인간은 사고하기도 하지만 감정도 품는다. 서정은 이중 감정을 주로 드러내어 표현한다는 의미다. 이 서정을 대표하는 문학 장르는 시를 으뜸으로 꼽는다. 시의 성격 중에서 두드러진 것이 서정으로, 시를 달리 서정시라 부를 정도로 시의 핵심적 속성이다. 이 서정성이 수필에도 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담겨있다. 이를 수필의 서정성으로 이를 만하다.
 
 수필의 서정성은 시의 서정성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같거나 유사한 점은 무엇이고, 변별 측면이 있는가 알아보자. 시와 수필의 공통적 서정성에 대해 먼저 살펴본다. 첫째로 시와 수필에서 드러나는 서정성은 개인의 개별적 정서이다. 창작 행위가 개인적 독자 활동이므로 당연한 귀결이다. 독자와 공감을 나눌 수는 있지만, 한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고 정서이다. 또는 누구라도 느낄 수 있지만, 누구도 느껴보지 못한 고유한 한 개인의 감정을 펼칠 수 있다. 그만큼 독창적인 감정이 서정성, 문학 서정성의 특질이다. 이점에서 시와 수필의 장르적 차이는 없다.
  
둘째로 시와 수필로 드러난 서정성이다. 여기서 드러난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잠복하거나 저류로 침잠한 감정이 아니라, 문자로 표현된 서정이다. 서정에서 중요한 것은 펼쳐내어 일종의 형상을 이룬 서정이다. 독특한 어떤 개인 감정을 어느 순간에 품는다 해도 그 상태로 머물러 있다면 그건 서정이 아니다. 그대로 막연한 채 무한한 감정일 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어날 수 있는 감정의 원형질이다. 이 감정은 인간의 다종(多種)한 표현 양식으로 드러나기 전의 원재료인데, 이것이 문학과 예술의 서정이 되려면 표현매제(vehicle)에 실려 형상화하여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시와 수필에선 문자 시스템을 거쳐 형상이 드러난 형태의 서정이며 공통적인 서정성이다. 언어화된 서정, 즉 형상화된 서정을 말한다.
  
셋째로 사유와 연결된 서정성이다. 감정은 사유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을 품고 느끼는 것도 두뇌의 작용이다. 두뇌의 반응 지점이 다르고 전개 양상이 다를 뿐 한 사람의 뇌에서 발생하고 인지하거나 자각한다.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정신활성은 상호 연계적이다.


온전히 사고 작용 없이 감정만 단독으로 발생하기는 불가하다. 두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고 선후가 있으며 강약에 차이가 날 뿐 별개로 발생할 수는 없다. 분명히 좌우 뇌로 분리되어 발생하는 거라 해도 한 인간의 두뇌 안에서 일어나는 정신 작용이라 서정도 사유가 부분적으로 담긴 것으로 보는 것이 온당한 이해일 것이다. 상상력과 허구성의 구별이 있을 수 있지만 시의 서정과 수필의 서정은 사유가 동반하지 않는 건 존재 자체가 불가하거나 온전히 감정만의 서정은 문학에선 의미가 없다. 무질서한 상태 혹은 사유로 통제되지 않는 무의식과 무절제하거나 무균형의 서정은 아니다.


문학에서 요구하는 서정은 사고와 조화를 이룬 서정일 때 가치가 있다. 현대 소설과 시에서 무의식의 자유로운 발현이라는 미명하에서 자동기술법에 의한 문학이 한 때 발생했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그것도 어느 정도 사고의 통제를 받아야 가능한 현상이다. 단어를 선택하고 (그냥 떠오른다 해도) 문장이 되어 글이 되기 위해서는 적은 상태로도 통제된 사고가 필요하다. 다만 기존의 서술과 표현보다 즉흥성과 임시성, 작위성의 거품이 벗겨진 상태로 가공되지 않은 사유요 감정에 방점을 둘 뿐 전면적인 방언(종교적)이나 넋두리(정신질환자)가 아니다. 시와 수필에서 요구하는 서정은 균형을 갖춘 사유 활동으로서의 서정성이어야 하고, 그러한 서정성이 문학적 가치를 갖는 서정이다. 말하자면 정돈된 서정을 요구한다.
  
넷째로 시와 다른 수필에서만 찾을 수 있는 서정성을 대조적으로 알아보자. 첫째, 수필의 서정성은 연속된 서정이다. 시의 서정이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서정이라면, 수필의 서정은 기-서-결을 갖춘 서정이다. 또한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서정이 시에서 보는 서정이라면, 수필의 서정은 지속적이고 장편적인 서정이다. 시의 서정이 집약적인 서정이며 수필의 서정은 확산적이라 하겠다.
  
둘째, 수필의 서정성은 설명적이다. 시의 서정이 제시적이고 이미지적 서정이라면 시는 서술적이고 설득적인 서정이다. 수필의 서정은 이미지로 드러낼 수 없고 스토리를 동반한 체험적 사실적 시공간에서 드러나는 서정이다. 시의 서정은 상상을 넘어선 허구적 시공간의 가공적 서정인데 반해, 수필의 서정은 작가의 체험적 실체를 드러낸 서정이므로 시의 서정정보다 직접적인 서정이다. 시는 추상적 서정성일 수 있다면 수필은 구상적 서정성일 수 있다는 말이다.
  
셋째, 시의 서정은 율동적인 서정인 반면에, 수필의 서정은 서술된 서정이다. 이는 시의 서정이 입체적이라면 수필의 서정은 평면적이라 말해도 좋다. 이건 가공을 통한 허구의 사실에서 유발한 상상의 차이에서 연유한다. 때문에 수필의 서정은 상상으로 추상하거나, 독자가 공감하기 위한 공력을 시에 비해 많이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 다시 말하면 독자와 작가 사이 서정의 공감대가 자리하는 거리가 시에 비해 그리 멀지 않다.
  
이상으로 수필의 서정성을 시와 비교하고 대조하여 알아보았다. 여기서 서정을 시와 견주어 살펴서 공통성과 차별성을 살폈지만, 이들은 상당히 유사하여 서로 넘나든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일한 서정이나, 시와 수필의 장르적 특성에 따라 외적으로 드러난 양상에서 차이가 난다고 말할 수 있다. 동일한 감정도 시로 표현할 때와 수필로 서술할 때는 장르의 특성에 따라서 변질되고 변형되어 조정이 된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는 시인과 수필가의 작품에 드러나기 이전 원질의 감정을 알 수 없고 추정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별로 형상화된 서정을 대상으로 논의하는 셈이라서 드러나기 앞선 감정의 원석은 가공한 이후의 감정 보석만으로 추정하는 데도 일정 부분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다만 여기서 명심할 것은 수필에서도 서정성은 시에 못지않게 중요한 특징적 장르 요소란 점이다. 따라서 수필에서도 서정성을 표현하고 감상하며 인식하는 일이 무엇보다 요긴하다 하겠다. 다음 예문을 보면서 더욱 이해를 북돋기로 하자.
 
  예문 1
 
  고향집 뒤란, 작은 단지 큰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대
 
  고추장 단지, 새우젓 독, 된장항아리……납작한 단지, 길쭉한 독, 펑퍼짐한 항아리, 입술이 도톰한 단지, 코가 비뚤어진 독, 귀가 찌그러진 항아리, 이마가 반짝이는, 목덜미가 붉은, 허리가 굵은 독, 항아리들이 간장 고추장 된장을 가슴에 담고 가부좌를 튼 채 참선에 들었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서리가 오고 눈이 내려도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뻐꾸기 독경소리, 딱따구리 목탁소리, 매미들의 범패, 달님도 별님도 지켜봅니다 바람도 숨을 죽입니다
 
  저 보살들 다 성불하시면 참 맛난 세상이 되겠지요
​ (임문혁, <아주 오래된 사원> 전문, 《귀·눈·입·코》, 시와 소금, 2016, 34면.)
 
   이 시는 고향집 장독대를 제재로 한 서정시다. 장독대의 항아리들을 서정의 대상으로 삼아서 시인의 감정을 펼친다. 첫째 전 4연의 모든 서정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며 서로 단편적으로 분리된다. 제1연은 풍경으로서의 서정, 개괄적인 서정을 펼친다. 제2연은 항아리들의 개별화된 형태적 서정이다. 예컨대, ‘납작한, 길쭉한, 펑퍼짐한, 도톰한, 비뚤어진, 찌그러진, 반짝이는, 굵은’ 수식어에서 외형적 특징을 드러낸다.


화자가 여러 항아리들을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감정은 일시적인데, 이 모든 항아리들은 ‘가부좌를 튼 채 참선에 들’은 느낌이다. 제 3연은 역시 다른 서정의 펼침이다. 자연 풍경, ‘비, 바람, 서리, 눈, 달님, 별님’ 따위와 불교적 정서, ‘독경, 목탁, 범패’ 등으로 조화시킨 감정의 제시로 순간적이고 일시적 서정이다. 이렇게 각 연별로 분리된 서정은 제 4연에서 집약된 서정 ‘참 맛난 세상’으로 마무리 된다. 제1연의 ‘단지, 항아리’들은 제 4연에 이르러 어느 사이 ‘보살들’로 변전하여 ‘성불’을 고대하길 기원하는 ‘아주 오래된 사원(제목)’의 주인공으로 탈바꿈한다.
  
둘째 이 시의 서정은 가공적이고 허구적이다. 단지와 항아리를 보살로 보거나, 가부좌 틀고 참선하여 성불한다는 설정은 허구이고 가공적 상태이다. 사물인 단지를 보살로 본다는 자체가 현실 세계에선 있을 수 없다. 그야말로 상상이 빚어낸 허구이다. 이 허구에서 빚어진 서정은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시인이 만든 이미지를 제시할 뿐이다. 독자가 이를 공감하든지 수용하는 것과는 사실 관련이 없다. 그렇다 보니 구상적이라기보다 추상적 서정일 뿐이다. 왜 항아리가 보살이 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이미지를 던져놓고 제시하는 것으로 그만이다. 이것이 시의 서정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셋째 이 시의 서정은 율동적이고 입체적이다. 율동성을 위해 여러 개의 쉼표를 사용하고, ‘~습니다, 요’의 경어체를 선택한다. 제 1연은 서술어나 종결어미도 없다. 명사 ‘고향집, 뒤란, 단지, 항아리들, 장독대’와 형용사와 부사 ‘작은, 큰, 옹기종기, 모여 있는’으로만 사용하여 율동성을 배가한다. 이밖에도 동일한 음운 쌍, ‘~는, ~은, ~고, ~도, ~다’를 의도적으로 율동에 맞게 배치한다. 평지의 장독대 항아리를 천체의 별과 달, 사계의 변화와 연결하고, 인간의 불교 신앙과 연계하여 시공간으로 펼쳐 입체화한다.

예문 2
 
   이삿짐을 풀고, 정자동 재래시장에서 춤이 두 자가량 되는 단지 다섯 개를 사왔다. 갖가지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있던 장무새를 단지에 한 가지씩 옮겨 담았다. 이들도 우리처럼 산뜻한 새집으로 이사하는 것을 환호했다.
  
숨 막히는 통에서 빠져나온 장무새는 사람의 옷이 날개이듯이 매초롬한 단지에 담기는 순간부터 때깔이 달라졌다. 뒤태도 앞태도 그만이다. 볼수록 옹골지다. 마른 수건으로 자꾸 닦는다. 그리고 다섯 개 단지에게 이름표를 붙인다. 우리 집 맛깔의 대표 주자인 간장 단지에는 ‘맛순이’, 오래된 친구 같은 묵은 된장 단지에는 ‘죽마고우’, 풋풋한 새색시 같은 햇된장 단지에는 ‘새댁’, 품격 높은 고추장 단지에는 ‘홍장미’, 그리고 봄의 향기를 사철 담아내는 매실 효소액 단지에는 ‘매향이’라고. 단지들은 이름을 지어주니 싱싱한 생기가 돌아 살갑게 다가온다.
  
다용도실 장독대 자리는 우리 집에서 정동향이다. 그래서 장독들은 일출과 월출 시에 가장 먼저 해와 달을 맞이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나도 이 친구들에 끼어서 일출과 월출을 맞는 느꺼움을 맛보고 있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 횟수가 잦아진다. 동탄 쪽 산 위에 붉게 솟은 햇덩이를 통째로 품은 불룩한 단지를 보면, 새날의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푼다. 저녁에는 달빛을 흡입하여 윤기 자르르한 단지들은 신비함까지 배어나며, 끝없는 생각의 바다로 이끈다. 단지들은 이렇게 묵은지 같은 친구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존재감을 과시한다.
  
네 딸들의 입시와 취업시험이 계속될 때였다. 마음이 볶음 냄비에 기름 닳듯 자글거릴 때면 장독대로 나가 조용히 마음 문을 열었다. 큰딸과 둘째 딸의 혼삿날을 받아놓고 질정 없는 마음을 달래주던 곳도 이 장독대였다. 어디 그뿐인가? 남편과 찌그락짜그락 복닥거린 후에도 이곳에서 위로를 받곤 했다. 그래서 이들 앞에 서면 너울 같던 마음의 파도가 영랑호 수면처럼 잔잔해진다.
 (김덕임, <장독대> 일부, 《심껏 살다 보면 좋은 끝이 올 겨》, 생각나눔, 2015, 93-94면.)
 
   이 수필은 앞의 예시처럼 장독대를 제재로 한다. 이 글이 시와 어떻게 다른 서정성을 펼치는지 보기로 하자. 첫째 시와 달리 연속적이고 기-서-결로 연결되어 확산하는 장편 서정이다. 첫 문단에서 이사하며 단지를 사와 장독대를 마련한다. 둘째 문단에서 이 단지에 간장, 된장 고추장 들을 옮겨 담는다. 셋째 문단에서 자리 잡은 단지와 작가는 서로 존재의 일체감을 형성한다. 넷째 문단은 복잡한 가정사를 이들이 위로한다. 앞의 시(예문 1)에서 화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장독대의 서정만 드러낼 뿐이다. 이와 달리 이 수필에는 화자 즉 작가가 등장하여 장독대에 대해 어떤 감정을 지니는지를 기-서-결의 스토리로 연속시켜 긴 시간의 서정을 보인다. 장독대는 어느 사이 화자와 일체가 되어 감정을 교류하는 존재로 변전한다.
  
둘째 이 수필이 보여주는 서정은 설명적이고 설득적이며 직접적이고 구상적이다. 시와 달리 장독대의 단지에 대한 감정을 이미지로 제시하지 않고 설명하고 독자를 설득한다. 어떤 때 왜, 장독대와 일체감을 갖게 되었는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한다. 이 과정에서 장독대로 향한 감정의 정체를 낱낱이 설명하여 구상적으로 드러낸다. 집의 정동향 자리에서 일출과 월출을 먼저 맛본다거나, 생각의 바다로 이끌어 존재감을 과시하며 화자에게 새날의 기대감으로 가슴을 부풀게 한다고 말한다. 종국에는 가정사의 위기나 곤란에 화자의 심란함을 달래주고 위로해준다며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독자에게 작가의 감정을 설득한다. 시와 전혀 다른 서정성의 표현과 전달 방식이다.
  
셋째 이 수필이 표현하는 서정성은 서술적이고 평면적이다. 설명 방식의 서술이 그러하고 해와 달이 등장해도 화자의 감정을 연결하여 입체화를 시도하는 대신 평면적으로 맞이하는 ‘느꺼움’을 맛볼 뿐이다. 이러한 서정은 구체적 체험에서 우러나온 사실적 서정이기에 허구적 서정인 시와 달리 입체성으로 가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수필의 서정은 독자가 별도의 상상을 펼치려고 애쓰지 않아도 수월하게 공감의 자리로 불러들인다. 그만큼 독자와 작가의 거리는 가깝고 친근감이 더 깊어진다고 보겠다.
  
앞에서 시와 수필의 서정을 비교하여 대조적으로 살펴보았다. 시와 수필 모두 ‘장독대’를 주요 제재로 각기 다른 장르의 문학을 생산하였는데, 서정성의 질에서 편차가 있고 재현 방식에서 차이를 보였다. 이렇다 해서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는 스토리가 없는 정적인 서정이라면, 수필은 이야기가 따른 동적인 서정인데 둘 다 사물에서 일어나는 개인적 서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정물화라면 다른 하나는 영상이라고 비유할 수 있겠다. 또한 시는 정의적(定義的)이고 관찰적 서정인데 반해, 수필은 체험적이고 현실적 서정이다.


말하자면 시에서의 ‘장독대’는 관찰하여 그 의미가 어떠하다고 명명하는 서정이라면, 수필에서의 ‘장독대’는 작가가 현실에서 체험하면서 자연스레 우러나온 서정인 점에서 차이난다. 하지만 시인의 관찰과 정의 역시 수필에서도 사용한 방식이고, 수필가의 현실 체험 역시 시인에게도 해당하는 숨겨진 과정이다. 시인이 그려내는 ‘장독대’의 서정이 순전히 허구적 상상으로만 펼쳐질 수 없다. 어느 시절 시인은 고향집 뒤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단지와 항아리들을 관찰하거나 만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고향집과 유사한 어느 곳에서 비슷한 장면을 체험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기억 속에 잠겨 있다 어느 순간에 시로 형상화 되면서 서정으로 재현했을 터이다. 구현된 서정의 양상은 시와 수필의 장르적 특성으로 구별이 되나 저류하던 서정의 원형질은 둘 다 상통하는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둘의 서정성은 소통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