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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론

에세이의 본질과 형식/강돈묵

에세이향기 2023. 7. 9. 08:58

에세이의 본질과 형식

 

 

 

강 돈 묵

 

 

1. 들어가면서

흔히 ‘수필가는 많은데, 수필은 적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나 자신은 어떻게 글을 쓰고 있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큰 것은 글쓴이들의 작가 정신의 결여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한다. 그렇다고 하여 타 장르의 작가들보다 수필가들이 나태하고 안이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똑같은 경우인데도 다른 장르의 허물보다 수필의 허물이 겉으로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또 한 가지는 일반 독자들의 의식 속에 수필을 폄훼하는 인식이 깊이 뿌리내려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러한 의식은 수필가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수필의 장래에도 아주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본 발표에서는 수필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 형식의 특질이 무엇인가를 헤아려봄에 있어서 이런 수필에 대한 오해를 풀어보는 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자 한다.

 

2. 수필의 본질

수필의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한 언급은 많이 있다. 수필의 깊이와 경지를 높이 평가하고 ‘수필이란 히말라야산맥의 정상처럼 장엄하고 숭고하다.’고 한 찰스 쇼우(Charles B. Shaw)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상성의 “수필이란 무엇인가”에서처럼 ‘수필은 시나 소설과 같은 고도의 기법을 요구하지 않는다. 쉽게 아무나 할 수 있는 문학이다. 말하자면 기초적 문장 훈련방법으로 아주 적당하다. 또한 오랜 훈련의 준비가 없어도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필가가 될 수 있다.’고 폄훼하는 주장까지 천차만별의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이 아니었나 한다. 이 말에는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수필이 시나 소설처럼 고도의 기법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시나 소설은 고도의 기법만 익히면 된다는 얘기인가. 문학은 작가의 혼이 배어 있어야 한다. 문장이란 관심만으로 써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쓴 글이 문학작품은 더욱 아니다. 수필에는 작가의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문학의 어느 장르보다도 삼다(三多) 중 다상량(多商量)에 가장 심취해야 하는 것이 수필이다. 조금만 더 수필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연구했다면, 수필을 문장 훈련의 방법 정도로 인식하는 견해는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김진섭은 “수필소론”에서 ‘수필은 제약도 없으며, 계통도 없이 자유롭고 산만하게 쓰인 모든 문장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까닭으로 흔히 비문학적인 인상을 사람에게 주는 것이지만’ 하며 수필의 자유로움을 지적하면서 ‘생활단면 모두가 그대로 내용이 되는 수필이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며 결코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 수필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피천득은 “수필”에서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으로 고치를 만들 듯이 만들어진다.’하여 수필의 유연성을 꼽았다.

또 몽테뉴(Montaigue)는 그의 “수상록”에서 ‘이 수상록은 나 자신을 그린 것이다.’고 기술함으로써 수필이 고백의 문학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몽테뉴의 고백은 훗날 수필문학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했다. 수필이란 가장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내보임으로써 독자와 가까워지는 문학 장르인 것이다.

수필에 대한 그릇된 견해에 일침을 가하는 윤홍로의 “수필작법 서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수필은 어중이떠중이가 모여서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잡다(雜多)가 아니다. 정녕코 수필은 시나 소설의 양로원이 아니고, 모든 문학작품의 공중변소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은, 독자들에게 수필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 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주장들을 종합하여 정리해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수필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로 수필은 자유로우면서도 고아하고 유연한 고백의 문학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수필을 폄훼해서 아무나 아무렇게나 관심만 가지고 쓰면 된다는 견해이다. 앞의 것은 대부분의 수필가들의 인식이고, 뒤의 것은 타 장르의 문인이나 일반 독자들의 인식일 것은 뻔하다. 수필가들이야 늘 수필에 애정을 가지고 창작에 임하다 보니 그 장르적 특성을 접해 아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진즉에 가졌던 인식을 쉽게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수필가들이 앞장서서 제대로 인식하도록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수필에 대한 폄훼의 인식은 왜 생겼을까. 첫째 이유는 ‘생각나는 대로 ․ 붓 가는 대로’의 교육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김광섭의 “수필문학 소고”에서의 ‘생각나는 대로 ․ 붓 가는 대로’라는 지적은 나름대로 수필의 본질을 밝힌 말이겠는데, 그 참뜻이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고 표면상의 의미로만 전달됨으로써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지적이 정확한 의미 풀이와 해석이 곁들이지 않은 채로 어린 학생들에게 전달됨으로써 수필을 폄훼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이 글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학생들에게 제공될 당시에는 우리의 교육이 암기식이고 주입식이었으므로 단순 논리에 처했던 당시의 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클 것이다. 아직 그 시대에 학습한 세대들이 이 사회의 주역이기에 이런 인식의 바로잡기는 그리 수월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나는 대로’는 어디까지나 수필 내용의 다양성을 지적한 말이고, ‘붓 가는 대로’는 형식의 다양성을 지적한 말임을 기억해야 한다. ‘생각나는 대로’는 수필을 쓸 때에 생각나는 대로 적어나가면 한 편의 수필이 된다는 것처럼 보이나, 결코 그런 말이 아니다. 글을 쓰다보면 어떤 소재는 시로 써야 하고, 어떤 것은 소설로 써야 하는 것이 구분되지만, 수필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 생각나는 모든 것들이 수필의 내용인 재료가 될 수 있다는 다양성을 지적한 말이다. 그냥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쓰라는 귀띔이 아니다.

여기서 고백의 문학인 수필이 신변의 사건을 다루게 되어, ‘신변수필’과 ‘신변잡기’의 혼돈이 야기된다. 사실 수필가들은 ‘신변잡기’라는 말만 들어도 두드러기 반응을 보일 정도로 싫어한다. 수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탓도 있지만, 수필가 자신들의 노력 부족에서 오는 부분도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글이 ‘신변잡기’로 추락하지 않으려면,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면 ‘본격수필’과 ‘신변잡기’는 어떻게 다를까. 이 둘의 차별화는 그리 쉽지 않다. 글의 소재를 소개하는 예시부분만으로 완성된 글은 신변잡기에 떨어지기 쉽고, 개개의 사례가 지니는 개연적 의미를 한군데 묶어 일반화하는 부분이 있으면 본격수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까 개개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예시의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그 소재가 갖는 의미, 즉 삶의 의미를 반드시 찾는 일반화 부분이 있으면 본격수필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본다. 가령 신변의 이야기를 쓰더라도 일반화시켜서 삶에 대한 해석을 내리면 그것은 신변수필이 되겠으나, 신변의 이야기만을 쓰고 말면 그것은 신변잡기에 머무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수필가가 신변잡기로 추락하는 글을 쓰지 않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수필도 온전한 한 장르로 대접받게 될 것이다.

수필 폄훼의 두 번째 이유는 예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장르론에서 기인한다. 전통적인 장르론에서는 서정, 서사, 극 등 셋으로 구분하여 왔다. 이 세 장르는 전환적 표현을 토대로 한 것들이다. 즉 허구를 용납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왔다. 그러나 요즈음 비전환적 표현을 토대로 한 교술 문학을 제4장르로 인정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교술 문학의 대표 격으로 수필을 내세우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록 비전환적 표현을 내세우더라도 작품의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소의 허구가 가미되어야 한다고도 보는 견해도 많다.

수필을 이렇게 한정하다보니, 정신적인 작용에서 다른 문학 장르보다 밀린다 하여 문학의 한 장르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의 폭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 정보화시대에 접어들면서 변화의 폭은 일년이 백년이다. 지금부터 50년 동안의 변화의 폭이 오히려 그 이전의 변화의 폭보다 훨씬 크다. 이렇게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문학에 있어서의 변화의 폭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제 문학에서도 변화의 폭을 인정해야 한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문인수가 8,000여명이고, 그 중 수필가가 1,800여명이다. 두 번째로 많은 작가가 포진해 있으면서도 제대로 장르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앞으로 사이버 공간 안에서 문학이 이루어짐으로 수필은 어느 장르보다도 대중과 접근성이 수월할 것이다. 이제는 문단인들의 정확한 현실 인식과 슬기로운 지혜가 모아져야 할 때가 되었다. 더구나 수필의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있어 왔고, 서양에서도 그 역사가 깊다. 역사성으로 봐도 떳떳한데 더 이상 폄훼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이제 수필의 본질을 정리해 보자. 그 동안의 주장을 토대로 정리하면, 수필은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사물이나 사건을 작가의 시각으로 해석해 내고, 작가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여 논리적으로 기술하여 형상화하는 문학 장르이다. 그래서 수필을 보면 작가의 삶에 대한 애정과 고뇌가 함께 어울러져 작가만의 색깔이 드러나게 된다. 작가가 삶의 현장에서 뜨겁게 자신을 사랑한 흔적이 짙게 풍김으로써 독자는 작가의 두뇌를 보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은 고백의 문학이고, 관조의 문학이다. 수필가는 자신의 가슴 그 밑바닥에 찌꺼기처럼 가라앉은 삶의 편린들을 하나도 숨김없이 드러내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프리즘을 통해 독자들에게 비춰주는 것이다.

 

3. 수필의 형식

문학에서 형식은 어디까지나 내용을 충분히 표현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형식은 그러니까 내용을 전달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이 글에서 내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것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까. 이것이 문학에서 요구하는 형식이다. 글은 나타내려는 뜻을 가장 정확히 기술하는 것이 최선이다.

수필의 형식의 다양함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수필의 내용이 우리의 머리 속에서 생각난 모든 것을 취할 수 있으므로, 그 다양한 내용만큼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은 시의 형식을 빌려올 수도 있고, 소설의 형식, 희곡의 형식을 빌려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며, 희곡도 아니다. 역시 편지글이나 기행문의 형식을 빌려올 수 있으나, 결코 편지글도 아니고, 기행문도 아니다.

분명 편지글과 편지글의 형식을 빈 수필과는 다르다. 편지글에서는 처음 인사말을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자신이 할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끝인사를 하여 글이 끝이 난다. 여기서 편지글은 쓰는 이와 받는 이가 공유한 세계가 있어서 둘만의 이야기를 주섬주섬 생각나는 대로 엮어 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수필에는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음으로 그 주제와 관계가 없는 것들은 끼어들 틈이 없다. 수필은 비록 편지글의 형식을 빌렸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기행문과 기행수필도 다르다.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여정에 따라 기술하면 되는 것이 기행문인 반면, 하나의 주제를 정해 놓고 그것과 관련 없는 것들은 과감하게 배제시키는 것이 기행수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수필의 내용과 주제에 따라 형식은 결정되는 것이다. 형식은 어디까지나 내용과 주제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것이 있다. 그것을 찾아 번번이 창조해야 하는 것이 수필의 형식이다. 그래서 백편을 쓰면 백 개의 형식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수필가의 임무이다.

흔히 무형식이라 하여 수필을 비논리적이고, 무질서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짧은 글이기에 더 치밀하고 군더더기가 전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수필의 형식을 지적한 말 중에 가장 우리에게 와 닿는 말은 ‘붓 가는 대로’ 와 ‘무형식의 형식’일 것이다. 이 말도 ‘생각나는 대로’와 같이 그 의미가 많이 오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붓 가는 대로’는 수필 형식의 다양성을 지적한 말이다. 이 말은 언제나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말을 곁들여 우리의 마음을 느긋하게 해 주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짧은 길이의 글인 만큼 자신이 독자에게 던질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하려면 치밀한 구상과 구성이 필요하다. 붓 가는 대로 쓰인 수필에서 어찌 문학적인 성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전혀 군더더기가 없이 치밀하게 절제된 언어로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수필이다. 형식이 없다는 것은 역으로 형식이 많다는 것으로 인식해야 하며, 어떠한 형식이든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형식이란 반드시 틀이 있는 것이다. 일정한 상태나 고정된 성질이 바로 형식이다. ‘무형식의 형식’이란,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개성에서 창출되어 나온 것을 의미한다. 또 수필의 형식은 내용에 따라서 그곳에서 요구하는 특별한 것이 있다. 그러니까 수필의 형식은 작가의 개성이나 작품의 내용에 따라서 다분히 개별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다형식’이 바로 수필의 형식이란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필은 길이의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긴 수필이 있을 수 있고, 짧은 수필이 있을 수도 있다. 굳이 긴 수필은 아니 된다는 규정을 둘 바도 아니지만, 수필은 짧아야 한다는 요구도 할 바가 아니다. 글의 내용에 따라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다. 다만 새로운 길의 모색을 위해 형식의 변화를 시도할 필요는 있다. 이것 역시 수필의 ‘낯설게 하기’의 일환이 될 것이다. 6매 수필, 9매 수필, 또는 장편수필 등 어느 것이든 괜찮다. 다만 용어의 정리는 필요하겠으나, 새로운 시도는 끊임없이 전개될수록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꾸준히 시도하다 보면, 수필의 영역이 넓어질 것이기에 바람직하다.

문학의 형식은 궁극적으로 문장으로 표현된다. 모든 문장에는 작가의 품격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특히 수필이 고백의 문학임에 비추어 볼 때, 수필 문장은 다른 어느 장르보다도 품격이 드러난다. 그래서 수필 문장은 진솔한 문장이어야 하며, 미사여구를 피하고, 독자가 알아듣기 쉬는 문장이어야 한다. 수필의 문장은 초보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은 문장이다.

수필의 문장은 작가의 개성이 나타나는 문체여야 한다. 또 나타내려는 바가 명료하고 간결해야 한다. 한마디로 군더더기가 없어야 하는 것이 수필의 문장이다. 만약 교훈성을 갖는 글이라면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간접적인 것이 효과적이다. 수필의 문장이 지적 정보를 제공하고, 유머와 위트가 있으면 독자에게 오랜 여운을 남기게 된다.

특히 한국 수필의 문장은 서구의 그것과 다른 것이 있다. 한국어는 모든 문장의 주체가 인간으로 되어 있어서 수동형이 발달되지 않은 관계로 고백의 문학인 수필의 문장에서는 주어인 ‘나’를 생략하는 것이 더 부드럽다. 수필의 문장에서는 어휘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작가의 인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행어나 은어의 사용도 거부한다. 된소리나 거센소리의 말에도 너그럽지 못하고, 속된 말 상스러운 말의 사용도 용납하지 않는다.

 

4. 나가면서

90년대 이후 많은 수필 문예지의 등장으로 수필가들의 수가 괄목할 만큼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에서도 그 어느 장르보다 많이 생산되고 있다. 양과 질적인 측면에서는 발전을 거듭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수필문학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문학의 거리에서 미아가 되어 방황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수필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의 본질을 말할 때, ‘생각나는 대로 ․ 붓 가는 대로’를 신봉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끼적거리면 수필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자신의 사적인 생활을 기술해 놓고 수필을 썼네 하는 어리석음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이러한 인식의 수정 없이는 한국수필의 장래는 기약할 수 없다. 맨 먼저 ‘생각나는 대로’는 수필 내용의 다양성을 지적한 말이고, ‘붓 가는 대로’는 형식의 다양성을 지적한 말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수필은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사물이나 사건을 작가의 시각으로 해석해 내고, 작가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여 논리적으로 기술하여 형상화하는 문학 장르이다. 수필에는 작가의 삶에 대한 애정과 고뇌가 함께 어울러져 있다. 고백의 문학이고 관조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수필의 형식은 내용과 주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형식은 어디까지나 내용에 따라 그것에 적합한 것이 있다. 그것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 수필가의 임무이다. 수필의 문장은 작가의 개성이 나타나는 문체여야 한다. 또 나타내려는 바가 명료하고 간결해야 한다. 본래 진실한 말은 간결하다고 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고백의 문학인 수필은 간결한 문장이어야 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흔히 무형식이라 하여 수필을 비논리적이고, 무질서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짧은 글이기에 더 치밀하고 군더더기가 전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수필문학도 이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할 줄 알아야 한다.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고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에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형식의 창출을 위해 실험정신이 늘 상존해야 발전한다. 앞으로 수필 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수필가들이 높은 예술성과 문학성을 지니기 위해 투철한 작가 정신을 발휘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수필가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부단한 노력과 전문성을 확보하기를 주문해 본다. 특히 수필 이론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이론과 작품이 상보적 관계를 형성할 때 수필의 앞날은 밝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