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南에 내리는 눈
황동규
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째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낮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눈
김종해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릴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눈, 오지 않는다
이규리
전국적으로 눈이 내리고 곳에 따라 폭설이어도
이곳은 눈이 오지 않는 나라
눈도 오지 않는 나라에서 어떻게 정치를 하니
뒤덮을 게 무어 있니
파계사 부근까지 와서
지금 눈을 기다리고 있다
소년 같은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때마침 전화가 왔고
당신도 내가 기다리는 시간 속에 있다고 말해 버렸다
거짓말 같기도 했다
우린 시인이니까
김수영은 아니니까
눈은 오지 않는다
소년 같은 시간도 오지 않는다
당신도 오지 않는다
그거 폭설이다
눈 오는 날 콩나물국밥집에서
복효근
눈이 뿌리기 시작하자
나는 콩나물국밥집에서 혼자 앉아
국밥을 먹는다 입을 데는 줄도 모르고
시들어버린 악보 같은 노란 콩나물 건더기를 밀어넣으며
이제 아무도 그립지도 않을 나인데
낼모레면 내 나이가 사십이고
밖엔 눈이 내린다 이런 날은
돈을 빌려달라는 놈이라도 만났으면 싶기도 해서
다만 나는 콩나물이 덜 익어 비릿하다고 투정할 뿐인데
자꾸 눈이 내리고
탕진해버린 시간들을 보상하라고
먼 데서 오는 빚쟁이처럼
가슴 후비며 어쩌자고 눈은 내리고
국밥 한 그릇이 희망일 수 있었던,
술이 깨고 술 속이 풀려야 할 이유가 있던
그 아픈 푸른 시간들이 다시 오는 것이냐
눈송이 몇 개가 불을 지펴놓는
새벽 콩나물국밥집에서 풋눈을 맞던 기억으로
다시 울 수 있을까 다시 그 설레임으로
심장은 뛸 수 있을까 사십에
그까짓 눈에 속아
입천장을 데어가며 시든 콩나물 악보를 밀어넣는다
방문객
마종기
무거운 문을 여니까
겨울이 와 있었다.
사방에서 반가운 눈이 내리고
눈송이 사이 바람들은
빈 나무를 목숨처럼 감싸안았다.
우리들의 인연도 그렇게 왔다.
눈 덮인 흰 나무들이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복잡하고 질긴 길은 지워지고
모든 바다는 해안으로 돌아가고
가볍게 떠올랐던 하늘이
천천히 내려와 땅이 되었다.
방문객은 그러나, 언제나 떠난다.
그대가 전하는 평화를
빈 두 손으로 내가 받는다.
겨울의 유서遺書
한우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네 글씨체가 아니구나, 아니라며
너에게 뛰어내리는,
너를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눈발이 허리를 비튼다.
네가 쓴 자서自序 한 줄도
언제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내가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맞는다.
눈발이 발목을 꺾는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강이 흐르면서 유서를 쓴다.
나무체였다가 구름체였다가
드문드문 창호지를 바른 얼음 밑으로
너의 서체書體가 드러난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강이 살얼음 물고 유서를 쓴다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 스케치
조현석
1
한밤의 심한 갈증, 깨어나, 얼어붙은 빗장을 연다, 꿈꾸는 철길, 달빛 내리고, 이상하다 숨죽인 나는, 오랜 갈증을 느끼며, 소양교 난간 나트륨 등빛의 겨울을 뒤집어쓴 화가, 만난다 바람이 지난 후
저절로 닫히는 덧문, 내 혀가 끼인다
2
달빛 없는 밤
서럽게 운다, 절반의 어둠이 가리운 문 틈에 끼인 붉은 혀와 초저녁부터 바람에 술렁이던 마을을, 문 밖 세상으로 돌아간 화가의 뒷모습을 생각하면
애당초 말을 하고 싶었다
짧은 혀 끝으로 더듬거리는
말을 하고 싶었다
겨울은 언제 시작하였는지, 눈을 감자
잠의 바닥에 깔린 들판을 가로질러
밤새워 폭설이 덮이고, 이미 낮은 세상은 더 낮아지고, 길눈의 거리에서 오도가도 못하며 몇 겹의 죄를 이고 지금 나는 섰는가
3
입을 굳게 다물어도 나의 고백은 쏟아지고
얼어간다, 놀라운 폭설이 그친
하늘은 고요하다, 붐비던 개찰구를 빠져나간
나의 꿈은 검은 비듬처럼 잎 지는
텅 빈 驛舍에서 겨울로 지고 있다
4
불투명한 유리가 깔린 땅 속으로 녹아내리는
내 속울음이
뿌리내리는 겨울숲 사이
얼지 않은 물소리가 조심스레
한 옥타브 낮게 늦은 오후를 가득 메우고
짓눌린 오후를 떠다니는 아, 그, 그
화가의 떠나지 않는 겨울
숲, 낮게 내려온 하늘을 깡마른 손으로 더듬는
겨울숲, 찾아드는 밤새떼, 종일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나무, 또 눈이 내리고
숲에서 잃어버린 말이여
나의 근시안에 각질의 어둠이 배고
순간, 온 마을이 일제히 켜드는 불빛
살아 있을 누군가의 지상에 덮인
눈이 부시다 눈이 부시다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손택수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
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루 햇빛
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
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
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어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새들은 북극으로 날아간다
이향
강 간너 쌍림공단 쪽에서
깃털에 따스함을 숨기고
쇠기러기 한 떼가 북극으로 날아간다
뭉텅뭉텅 욕설 게워내는 굴뚝 위로
폭설이 내려 세상의 길들 질척거린다
눈발에 못 이긴 나무들 길게 휘어지고
섬유공장 연사실 대낮에도 알전구가 껌벅거린다
서른두 살의 조선족 김금화 씨는
귀마개 꽁꽁 틀어막아도 눈내리는 소리 들린다
윙윙대는 기계 소리가 푸른 뽕잎 갉아먹고
다급하게 실 토해내어 고치를 만든다
고치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수천 마리 나비가 되어 꿈속을 날아다닌다
몰래 숨겨둔 적금통장에는
삼만 원 미만의 싸락눈이 하얗게 쌓인다
두고 온 북극 눈발에 파묻힌 무도
연초록 싹 내밀어 봄을 기다리겠지
막내의 바짓단도 겨울해만큼 짧아졌는지
더 자랄 데 없어 서걱이는 강둑의 갈대가
그리움에 얼굴 묻고 우는 저녁
젖몸살로 뒤척이다 뱉어놓은 보랏빛 한숨
한 가닥 물고 북극으로 날아가는
저 쇠기러기 떼
<200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귀로 듣는 눈
문 성 해
눈이 온다
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앉은 하늘
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
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
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
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
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홍건하다
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
일어선 그가 다시 귀기울이는 자세로 걸어간다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
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
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
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 있다
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내느라 분주하다
길바닥에 홍건하게 버려진 말들이
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산수화
오탁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함박눈이 퍼붓는 날
메두지기 지나 돌테미다리 건너
쇠음달 길로 접어들면
갈필로 그린 산수화 속으로
그냥 쑥 들어서는 것 같다
설한을 견디는 나뭇가지들은
제 팔목이 시려도
가지 끝에 잠든 새눈을
흰 목화솜으로 덮어주고 있다
여백이 한껏 펼쳐진
절세의 산수화 속에서
산토끼가 귀를 쫑긋 세우고
눈 속에 잠든 봄소식을
귀동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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