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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틀의 포란/조미정

에세이향기 2023. 10. 19. 04:10

재봉틀의 포란/조미정

재봉틀이 오동나무 탁자 위에 앉아 갸르릉거린다. 얼핏 차가워 보이는 쇠붙이임에도 어쩌면 저리도 섬세한 몸짓일까.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손길에 형형색색의 실들이 퐁당퐁당 땀을 낳는다. 홈질, 박음질, 새발뜨기 등 밤새도록 박은 바느질 종류가 많기도 하다.

재봉틀은 삼거리 중고 가게에서 우연히 눈을 마주친 오래된 골동품이다. 철제다리를 떼어내고 좌식으로 개조한 구닥다리다 보니 눈에 잘 띄는 곳에 버젓이 내놓기는 뭣하다. 그래도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 중의 하나이다.

무엇인가를 이어 붙이는 데에 재봉틀만 한 것이 있을까. 힘주어 발판을 구르면 침목 위의 기차처럼 시접을 따라 달린다. 윗실과 밑실이 얽혀 한 개의 바느질 땀을 만들어낸다. 노루발이 다 박은 천을 뒤로 밀어내면 또 한 땀이 박인다. 낱장이던 천과 천이 박여 한 벌의 옷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재봉틀의 포란(抱卵)을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

유년의 기억 언저리에서 장면 하나가 땀을 박는다. 마루에서 엄마가 재봉틀을 밟고 있다. 등에는 골목에서 숨바꼭질하는 아이들 소리가 업혔고, 동그란 대바구니에는 밤새 재단한 천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실패에서 빠져나온 실이 거미줄처럼 찰랑거리면 누추한 집 안이 변신을 거듭한다. 고구마 가마니가 쟁여진 다락방에 꽃무늬 커튼이 팔랑거리고 문풍지가 울던 방에는 화사한 색의 솜이불 홑청이 한기를 막는다. 아버지의 도시락 가방도 출퇴근길 자전거 바구니에서 달그락거린다. 술래를 피해 마루로 숨어든 나는 엄마의 재봉질을 지켜보느라 저녁해가 느릿느릿 저물어 가는지도 몰랐다.

엄마의 재봉틀은 가족의 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요술봉 같았다. 가난에도 주눅 들지 않도록 마음을 매만졌을 뿐 아니라 어떤 도전도 망설이지 않을 용기까지 북돋아 주었다. 한껏 기가 산 덕분에 우리 사남매는 칼칼한 세상 속에서도 번듯이 자리매김했으리라. 나도 언젠가는 엄마의 재봉틀처럼 되리라 몇 번이나 다짐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큰아이의 턱수염이 가뭇가뭇해질 무렵, 무난하던 내 삶의 재봉틀이 삐걱거렸다. 거친 세상 바람에 보금자리를 잃은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까스로 거처를 마련했으나 하루아침에 변한 신세가 서글퍼 나는 눈시울만 적셨다. 잦은 부부 싸움에 아이의 마음이 쪼그라드는지도 모르고 소리만 요란스럽게 덜커덕거렸다.

어미가 제대로 포란 하지 않으면 유정란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산소 공급이 잘 안되어 그만 썩어버리고 만다. 아이도 그랬다. 벗어날 마음자리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수능이 낼모레인데 학업을 팽개치고 밤새도록 게임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쿵쿵 달려가 컴퓨터 전원을 꺼버리면 그때부터 전쟁이었다.

그 무렵의 아들과 나는 잘못 박은 땀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긋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천을 뒤집어보면 제대로 박이지 못한 실들이 뭉텅 엉켜있었다. 재봉질에는 무엇보다 실의 장력이 중요하다. 윗실과 밑실의 밀고 당기는 힘이 골고루 맞물려야 고른 땀을 박을 수 있다. 우리는 정반대였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팽팽한 힘겨루기만 하다가 그만 바늘을 뚝 부러뜨리고 말았다.

구렁이도 제가 낳은 알을 품는다. 붉은 머리 오목눈이는 폭우 속에서도 둥지 속 알을 지켜낸다. 바닷물고기 도치는 바위틈에 낳은 알을 지키느라 먹지도 못하다가 알이 부화하자마자 생을 놓는다. 막 알에서 깨어난 새끼에게 제 몸을 녹여 갖다 바치고서는 마른 껍질로만 남는 벨벳 거미는 또 어떤가. 물자라는 암컷 대신 수컷이 아예 등에 알을 이고 다닌다. 다른 이의 포란은 그렇게 저마다 눈물겹건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자책했다.

창고 속에서 먼지 쌓여가는 재봉틀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다. 이제라도 기름칠하면 예전처럼 다시 고운 바늘땀을 박을 수 있을까. 너무도 안타까워 어느 날 햇살 부서지는 창가에 앉아 조용히 아이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러자 못 쓰게 된 줄 알았던 재봉틀이 뜻밖에도 제법 그럴듯한 땀을 하나 박아내는 것이 아닌가.

내친김에 언젠가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녹화해두었던 동영상 하나를 보여줬다. 그러자 아이가 움찔했다. 단말기 밖으로 굴러떨어지는 자신의 거친 목소리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한참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갑자기 무릎을 털썩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고개 숙인 아이의 눈에서 토도독 눈물이 떨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아이의 행동에 기쁨보다 안타까움이 앞섰다. 어렵고 힘이 들 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는 이가 없다는 서운함에 나는 세상을 향해 발톱을 세웠다. 아이는 그런 나를 보며 마음의 비늘을 세웠는지도 모른다. 등을 쓸어주지 못한 내가 너무 미안해서 아이를 얼싸안고 같이 울었다.

모처럼 햇살이 쨍쨍한 오후, 재봉틀이 포란 중이다. 이번에는 어미의 체온이 골고루 전달될 수 있도록 앞뒤, 좌우로 세심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알을 굴린다. 그러자 둥지 위에 가득하던 냉기가 흩어지고 빈자리에 따스한 기온이 몰려온다. 썰렁하던 마음과 마음 사이에 훈훈한 공기가 깃든다.

부모와 자식 간이라도 낱장이던 마음들이 서로 부딪히다 보면 내 맘처럼 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가까운 사이일수록 어긋난 마음은 더 큰 상처를 남긴다. 그럴 때 재봉틀이 조곤조곤 말을 걸어온다. 재봉틀의 본성은 뭉텅뭉텅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살갑게 이어 붙이는 데 있다고.

쉰 고개를 넘기고도 나의 포란은 아직도 어설프다. 그래도 서두르지 않으련다. 성심껏 알을 품다 보면 언젠가는 곱게 땀을 박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도 낡고 오래된 재봉틀 앞에 똬리를 튼다. 다른 알보다 다소 부화가 늦더라도 아이가 스스로 알껍데기를 깨고 힘차게 세상 밖으로 나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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