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들에게 경의 표한다 / 김애자
마전지애(麻田之艾)란 말이 있다. 마밭에 쑥은 마처럼 곧게 자란다는 뜻이다. 사람도 환경에 따라 인간성이 어떻게 형성되느냐와 마찬가지로 식물들도 유사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제멋대로 가지를 뻗어가며 자라야 할 쑥도 마밭에서는 마와 같이 오로지 햇빛만을 향해 ‘진지강화’형으로 곧게 자란다. 논에 나는 피란 식물도 벼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라지만 이삭이 팰때엔 본색을 드러내는 의태식물이다.
식물이 성장할 때 두 가지 유형으로 자란다. 위로 키를 높이며 자라는 ‘진지강화형’과 옆으로 줄기를 뻗어가며 자라는 것을‘ 진지확대형’이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식물들은 오랜 세월 동안 나름대로 생존을 위한 전략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주식으로 삼는 벼, 보리, 밀이나 조와 옥수수 등은 위로만 치솟는 ‘진지강화형’에 속하지만,고구마와 땅콩은 옆으로 줄기와 뿌리를 뻗어가며 땅속에서 열매를 키우는‘ 진지확대형’이다.
그러나 야생식물로 ‘진지강화형’의 대표적인 종은 망초와 갈대, 그리고 억새가 압도적이다.그중에서도 망초는 한 포기에 꽃을 피우고 나면 수십만 개의 씨앗을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내기 때문에 기하급수로 번진다. 개천과 강가를 뒤덮고 있는 갈대와 억새들은 더하다. 씨와 뿌리까지 동원하여 퍼지는 서슬 퍼런 위력을 보면 기가 질린다.
‘진지확대형’으로는 달개비와 클로버와 바랭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식물들은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중에서도 바랭이는 주변에 망초나 쑥, 명아주 따위의 우위성 식물이 있으면 진지강화형을도모하지만, 라이벌이 없을 때는 줄기마다 뿌리를 만들어가며 ‘진지확대형’으로 전략을 바꾼다.
나는 지금 며칠째 고민 중이다. 열무를 뽑아낸 자리가 비어있는 동안에 바랭이가 나타나 본거지로 삼아버렸기 때문이다.기어가듯 줄기마다 마디를 만들어 뿌리를 내리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이 무법자들을 퇴치시키려면 처음부터 호미 날을 중심에 대어선 안 된다. 새순이 뻗어나가는 자리부터 공격을 감행한 뒤 마지막으로 원뿌리를 잡아당겨야 전멸시킬 수 있다.
그러나 식물 중에선 줄기가 아닌 뿌리로만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종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쇠뜨기는 땅속 깊이 뿌리를 박고 끊임없이 솟아나와 농사꾼들이 여간 애를 먹는 것이 아니다. 독성이 강하기로 이름난‘ 근사미’이란 제초제를 써도 근절시킬 수가 없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폐허가 되었을 때도 가장 먼저 싹을 틔운 것이 쇠뜨기였다고 한다. 일본의 잡초생태학자인 이나가키 히데히로 선생은 쇠뜨기의 발생 연도를 3억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석탄이 되고 화석에너지 혁명을 가져온 식물이라고 하니, 쇠뜨기는 인류가 지구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부터 땅의 역사를 가장 오래 지켜온 셈이다. 거기에 모양도 초록색 줄기로 되어 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어느 것이 줄기이고 어느 것이 잎인지 구분하기가 쉽지않다.
잡초들 가운데 더러는 다른 식물의 모양을 흉내내어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의태(擬態) 종들도 적잖다. 우리 집 잔디밭에서도 잔디인 척 제 모습을 숨기고 자라는 풀들이 세 종류나 된다. 바랭이란 놈은 제 부모에게 물려받은 강한 유전인자를 감추고 잔디와 키를 맞추며 크고 있다. 바랭이로선 애초 잔디밭에서 태어난 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일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잔디에 가깝게 잎을 좁히고 키를 낮추는 변신술을 쓰지 않으면 곧바로 주인의눈에 뜨일 것이므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세포아’와 ‘오리새’도 같은 처지다. 전원생활을 시작하고 마당에 잔디를 깔고 나서다. 잔디와 함께 키를 맞추며 자라는 녀석들에게 나는 감쪽같이 속았다. 잔디와 너무나 흡사한 잎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식물들이 존재하는 목적은 씨를 맺어 종족을 퍼트리는 데 있다. 아무리 키를 낮추고 주인의 눈을 속이면서 자라지만, 이삭을 피워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근본을 드러내고 만다.
이른 봄이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한두 번은 보도블록 틈새나 금이 간 아스팔트 사이에서 여리게 돋아나는 풀잎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화단에서 제 몸의 열배도 넘는 흙덩이를 밀치고 올라오는 새싹을 보면 생명의 강인함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매번 봄이 오는 길목에 이르면 언 땅에서도 새잎과 꽃을 피우는 작은 꽃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작은 꽃들은 나무에 피는 큰 꽃들보다 먼저 꽃을 피워야만 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어 온 힘을 다해 추위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얼음 속에서 핀 복수초의 꽃술 위로 날아와 앉아 있는 벌을 보았을때 그 생존의 필연성 앞에서 나는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식물들은 이렇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숨은 저력을 지니고 있다. 바로 ‘세포 압력’이라는 무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포압력은 물이 저농도에서 고농도로 이동하는 삼투압을 이용하는 데서 생긴다. 물은 분자끼리 끌어당기는 응집력이 강할뿐더러 떨어지지 않으려는 장력을 지니고 있다.
식물은 바로 물과 물이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장력을 끌어올리려면 세포 압력을 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식물들이 지니고 있는 세포 압력은 5 내지 10기압 정도나 된다고 한다. 자동차 타이어의 압력이 2기압 정도라니 참으로 놀라운 힘이다. 식물들이 이 놀라운 압력으로 토양에서 필요한 수분을 흡수하고 나면 풍선처럼 세포가 부풀어 오르는데 이때 생기는 압력을 ‘팽압’이라고 한다. 식물들은 토양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삼투압과, 안에서 밖으로 밀어내는 ‘팽압’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열악한 환경에서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길가에 핀 민들레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미 곁을 떠나 바람을 타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저 혼자서 흙덩이를 밀치거나 혹은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자라는 의연함에 대해서 말이다.
그뿐만 아니다. 식물들은 낮이면 하나같이 광합성을 하기 위해 하늘로 머리를 치켜들고 있으나, 밤이면 반대로 냉기로 분산되는 열을 절약하기 위해 꽃과 잎을 오므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화단에서 골칫덩어리로 손꼽히는 괭이밥도 그렇고, 정원의 소나무 햇순도 해만 설핏해지면 잎사귀를 가지런히 모은다. 열의 손실을 막기 위한 식물들의 에너지 절약은 조금만 더워도 그 것을 참지 못해 차 안에서 에어컨을 팡팡 틀어대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생태수필을 쓰는 동안 나는 꽃 한 송이는 물론 벌레 한 마리도 예사롭지 않게 보게 되었다. 물론 사과 한 알도 그냥 먹지 못한다. 참외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심하게 보아온 꽃이며 벌레들이 저마다 거쳐 온 고난의 과정을 알게 되었고, 식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발려내는 수십 개의 과일 씨앗들이 하나같이 살아 있는 생명체요, 그 생명체들이 서로 공생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과, 좀 더 나아가서는 지구를 건강하게 떠받들고 있는 파수꾼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태학자 ‘짐 놀먼’은 한 술 더 떠 “잡초는 흙의 여신 ‘가이아(Gaia)’의 백혈구이자 부스럼 딱지이고, 반창고이자 항생물질”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올해도 장마로 떨어져나간 산사태를 봉합할 의사는 다름 아닌 잡초들이다. 따라서 항생제 치료를 맡아 상처를 아물게 할 담당 의사 또한 잡초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정녕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나는 풀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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