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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감나무 현관/조미정

에세이향기 2023. 10. 18. 14:56

감나무 현관/조미정

열댓 그루의 감나무들이 섬돌 앞에 늘어섰다. 어디 한 군데 매끈한 곳 없이 마디마디 가지가 뒤틀리고, 수피마저 물고기 비늘처럼 갈라 터진 노거수들의 사열식. 신석기 토기 같은 햇볕이 얼금얼금 빗겨 들며 대문도 없는 판잣집 마당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산골의 절반이 활엽수로 덮였어도 감나무 현관은 도드라진다. 나무들마다 이파리에 물든 정도가 전부 달라서이다. 마당 깊숙한 쪽은 도톰한 잎들이 그늘을 쓸어 담고 있다. 푸릇한 감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 아직도 한창인 청춘으로 보인다. 가운데는 단풍 대궐이다. 잎과 열매가 함께 불그죽죽 물들어 무르익은 중년을 대변한다. 길가 쪽은 벌써 져버린 인생 같다. 하루바삐 떠나가느라 마른 가지에 낙엽 몇 장만이 바스락거린다.

한낱 한시에 심은 나무들인데도 각양각색인 이유가 뭘까? 노부부가 껄껄껄 웃는다, 바쁜 농사일로 짬이 날 때마다 한 그루씩 감을 따다 보니 잎도 도레미 음계처럼 순서대로 물들었단다. 부양해야 할 열매를 매달고 있는 이상 감나무는 쉽사리 단풍 들지 않는다. 초록색 엽록소로 부지런히 양분을 만들어 가지 끝으로 보내기 위해서다. 그러다 열매를 다 떠나보내고 나면 잎은 하루아침에 힘을 잃고 시들시들해지고 만다.

유월, 다른 나무들의 녹음이 한창일 때 유달리 늦게 새순을 냈던 노부부가 생각지도 못한 꽃봉오리를 맺었다. 마흔을 훌쩍 넘겨 임신한 늦둥이 아들이었다. 남우세스럽다고 얼굴 붉히면서도 감꽃 떨어질세라 재빨리 크고 튼튼한 가지를 드리웠다. 천신만고 끝에 태어나자마자 노랗게 뜬 얼굴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을 때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지 한숨 났다. 그러다가도 어미 손가락을 꼭 잡고 방실방실 웃을 때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어느 해에는 가만히 서 있기조차 힘든 바람이 불어닥쳤다. 전재산을 털어 벌린 사업이 잘못된 것이다. 한여름의 넉넉한 품속에서 무럭무럭 익어가던 풋감들은 사정없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생가지도 뚝뚝 부러졌다. 얼마나 타격이 컸던지 감나무는 더 이상 소생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몰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 했다. 처음 뿌리 내린 곳에서 생을 이어가는 것이 나무의 운명이라지만 감나무는 예외다. 대목에 접을 붙여야 더욱 크고 풍성한 열매가 열린다. 노부부도 오래 살던 터전을 떠나야 했다. 멀리 유학 떠난 아이에게는 자세한 집안 사정을 쉬쉬한 채였다.

이곳저곳 헤매다가 발길 멈춘 곳이 비슬산 자락이다. 손에는 낡은 보따리 하나가 전부였다. 과수원 주인도 딱해 보였는지 거저 살라고 비어있던 창고를 내주었다.

낯선 산골에 접붙인 노부부는 밤낮으로 버둥거렸다. 잡초처럼 빽빽이 자라 나오는 곁가지는 부지런히 솎아내고, 높은 가지에 대롱대롱한 욕심은 날짐승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어떨 때는 바닥으로 떨어진 홍시가 퍽퍽 뭉개지는 소리에 자다가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그렇게 마음 다독인 세월이 몇 해였는지 가까스로 접붙인 마디에도 차츰 두툼한 옹이가 박혀 갔다.

각별한 과정을 거쳐서인지 감나무는 어느 나무보다 붉고 고운 물이 든다. 열매의 숱이 눈에 띄게 듬성듬성해졌을 때조차 중후한 멋은 그대로다. 오히려 낙엽이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더한다. 산비탈에 선 나무의 원숙미란 아낌없이 주는 자들에게 주는 자연의 특별한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감나무 현관이 아름답게 보인다. 지난날의 나는 노부부의 삶이 비루하다고 여겨질 때가 많았다. 외양만 보고 가치를 판단해서였다. 감잎차를 마주하고 앉아서도 뜨거운 솥뚜껑 위에서 자신을 비비고 덖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알고 보니 생의 나이테가 질 때마다 스며든 먹이 탄닌 성분과 어울려 아름다운 무늬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을.

현관은 집의 얼굴이다. 집 안 깊숙이 들어가 보지 않아도 내력을 환히 짐작하게 한다. 크고 넓은 현관, 소박한 현관, 미로 같은 현관 등 인생의 여로에서 만난 현관은 무수히 많았다. 감나무 현관은 그럴듯한 문패 하나 달고 있지 않아도 자꾸 눈길이 간다.

나의 현관은 어떤 모양일까. 선뜻 열어 보이기가 부끄럽다. 얼마 전만 해도 아낌없이 준다는 것은 호구 같은 짓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아등바등 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능선이 첩첩으로 누워있어 철퍼덕 주저앉았던 적도 허다했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준 것도 없이 서운한 마음만 쌓이다 보니 표정은 갈수록 각박하게 변해갔다. 이때 감나무 현관이 잔잔한 울림을 전한다. 무조건적 헌신보다 개개인의 행복이 더 소중해진 요즘 세상에서도 끝까지 사라져서는 안 되는 따뜻한 풍경이 있다고.

언젠가부터 노부부의 얼굴에도 반점이 거뭇거뭇하다. 금의환향한 막내를 장가보낸 다음부터였을 게다. 해야 할 일을 이제 다 끝마쳤다는 듯 늦가을 된서리에 우수수 잎사귀를 내려놓는다. 비워내듯 앙상해진 부부의 뒷모습은 떠날 때를 아는 이처럼 담담하다. 두꺼비 같은 손자 사진을 내보이며 잎 다 떨어진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등불처럼 환하다.

낙엽성 교목으로 키가 십 미터 넘게도 자라는 감나무. 이제 도시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어진 추억의 나무가 멀리까지 찾아온 답례로 아코디언과 풍금의 합주를 들려준다. ‘나의 살던 고향은~ ’ 함께 부르는 늙수그레한 음색이 산자락으로 조곤조곤 번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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