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이 밭의 서사/장미숙
택배가 도착했다. 시골에서 보내온 상자에는 된장과 고추장, 매실액과 들깻가루가 들어 있었다. 물건을 정리하고 전화를 드렸더니 엄마가 불쑥 말씀하신다. “들깻가루는 마지막으로 보내는 것인께 애껴 먹어라. 지난해 수확한 들깬디 인자는 더 못 할 것이여.”
마지막이라는 말이 가슴을 흔들었다. 오지 말아야 할 때가 기어이 오고 만 것인가. 당신 스스로 마지막을 선언한 건 이제 더는 몸이 아닌 의지로도 밭에 갈 수 없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오래전부터 몸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의지에 기대 힘겹게 노동을 이어온 엄마의 삶에서 영원히 밭이 떠나버린 걸 알았다.
가슴 속에 요지부동 들어앉은 오래된 우물처럼 다랑이 밭은 ‘고향’이나 ‘엄마’ 하면 떠오르는 밑그림이었다. 모든 먹을거리가 그곳에서 났고 엄마의 한세월이 촘촘하게 박혀 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이제는 현재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는, 오직 과거의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밭은 엄마의 시간 저장소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 혼자 지낸 세월에도 밭은 푸른색을 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억세게 매달렸던 것 같다. 흙을 그냥 놀릴 수 없다는 철학은 빼곡하게 밭을 채우는 일로 이어졌다. 밭과 엄마는 한 단어나 다름없었다. 비탈지고 거친 밭이었지만 그곳은 언제나 초록이 무성했다. 계단처럼 이어져 있는 다랑이 밭, 기름진 옥토도 아니고 넓고 평평한 토지도 아니었다. 선산 밑에 옹색하게 붙어 있는 박토에 불과했다.
부모님은 그곳을 고르고 다져 곡식이 자라는 땅으로 만들었다. 부모님이 젊었던 시절의 일이고 젊었기에 가능했다. 아버지가 한때 병을 앓으면서 가세가 기운 때문이었다. 곡식 심을 땅 한 뙈기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비빌 언덕은 선산이었다. 선산 아래 비어있는 땅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게다가 돌투성이였다. 무엇보다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게 가장 큰 흠이었다. 비탈이 심해 편평하게 다질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다랑이 밭이 되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진 밭이나마 마음대로 가꿀 수 있다는 것에 부모님은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뒤, 사철 그곳은 생명을 품었다. 모시, 양파, 고추, 고구마, 감자, 참깨, 들깨, 생강, 땅콩, 마늘, 팥, 콩 등 수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심고 가꾸었다. 밭두둑만 빼고 빈틈이 없었다. 심지어 돌 틈 사이에는 호박이나 도라지까지 심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모시가 낭창낭창 내 키보다 더 크게 자랐다. 모시 삼기가 한창이던 때 내게도 밭은 애증의 장소였다. 초등학교 시절, 모싯대를 잘라 묶어 머리에 이고 구불구불한 밭두둑을 많이도 걸었다. 걷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손바닥에 피가 맺혀도 모시는 줄어들 줄 몰랐다. 생것의 모싯대 무게는 돌덩어리처럼 단단했다. 여름 한때 비척비척 모시를 인 채 걷다 보면 유난히 발밑이 미끄러웠다. 비가 온 다음 날이면 고무신 위에서 날춤을 추었다. 머리에 인 모시를 근처 둠벙에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엄마 그림자를 밟고 가던 그때, 산 그림자는 빨리도 덮쳐왔다.
모시 밭은 다음에 고구마나 감자밭으로 바뀌었다. 더는 모시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은 시대가 도래한 때문이었다. 모시는 생명력이 끈질겨서 그 후에도 밭두둑에 시퍼렇게 살아서 어려웠던 시절을 상기시켰다.
고구마나 감자를 캐는 건 그나마 낭만이 있었다. 덩굴을 걷어내면 또르르 달려 나오던 발간 고구마들, 보물을 찾듯 고구마를 캐다 보면 어느새 고랑에는 무더기무더기 겨울 양식이 쌓였다. 자루에 담아 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다 어느 날은 뱀을 만나기도 했다. 혼비백산해서 자루를 던져버리면 뱀도 놀라고 나도 놀라 서로 도망가기 바빴다. 뱀띠라서일까. 유난히 뱀을 자주 만났다. 엄마에게 뱀 따위는 지렁이 같은 것이었다. 기다란 작대기로 삽시간에 훌렁 걷어서 산 쪽으로 던져버렸다. 그때 엄마는 용감무쌍한 여전사 같았다.
자식들이 고향을 떠난 뒤에 다랑이 밭은 고추로 붉은 물결을 이루었다. 휴가차 고향에 가면 비닐 포대기 들고 고추밭으로 가는 게 일이었다. 허리가 몇 번 끊어지고 나서야 끝나던 고추 따기는 그나마 쉬운 노동이었다. 엄마처럼 꼼꼼하게 하지 않았으니 노동이랄 것도 없었다. 진짜로 힘든 건 혼자서 밭을 지켜야 했을 엄마의 외로움이었음을 짐작했다.
고구마와 감자 농사를 포기하게 된 건, 산에 멧돼지가 출몰하면서부터였다. 애써 가꿔놓은 농작물을 헤집고 다니던 멧돼지를 몇 번이나 보았다고 엄마가 말했을 때 등에 소름이 돋았다. 밭이 산에 있다는 건 외로움에 더해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멧돼지가 내려온 길이만큼 엄마의 발걸음도 중간에서 멈췄다. 기운이 점점 쇠한 게 더 큰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손길이 닿지 않은 밭은 푸른색이 점점 엷어졌다. 엄마는 아래에 있는 밭에 주로 참깨와 들깨를 심었다. 밭을 오르내리는 일도 작대기에 의지했다.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땅을 엎고 비료를 뿌리며 힘이 다하는 날까지 그나마 지킨 밭에서 참깨와 들깨가 푸르게 자랐다. 등이 굽은 엄마를 따라 밭에 가서 본 건 칡덩굴이 덮어버린 다랑이였다. 한때는 그토록 푸르게 창창했던 밭이 사라지고 없었다. 칡덩굴에 덮인 밭 아래에 묻어둔 추억들이 밤새 마음을 기웃거렸다.
젊었던 엄마와 아버지가 벌겋게 뒤집어 놓은 흙, 그 안에서 실하게 영글어가던 감자와 고구마가 추억을 매달고 이어졌다. 눈물과 한숨이, 웃음과 환희가 묻혀있을 고랑과 이랑을 밟고 싶어 안달이 났다. 풀밭에 털버덕 앉아 메뚜기를 쫓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웃자란 잡초 위로 잠자리 몇 마리가 맴을 돌았다. 밭두렁에 앉아 작아진 엄마와 설핏한 햇살을 바라보는 사이에도 들깨와 참깨는 여물어갔다.
들깻가루를 좋아하는 자식들에게 마지막까지라도 당신 손으로 지은 걸 보내고 싶었던 마음이 늙은 엄마를 밭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손가락과 발가락에 겨우 남아 있는 힘으로 걷어왔을 들깨의 무게가 들깻가루가 되어 엄마의 마지막 발걸음을 전했다. 묵직한 다랑이 밭의 서사를 감당할 수 없는 지금, 내 마음에 자라는 들깨는 어찌 다 거둬내야 할 것인가. 실체는 없지만, 작용을 거듭하는 공(空)처럼 오늘도 들깨밭은 푸르게 푸르게 번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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