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살구 / 정은아

에세이향기 2024. 2. 4. 07:31

 

살구 / 정은아

 

검뿌연 하늘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온 사방에 꽂혔다. 잎사귀 사이로 몸을 숨겨보지만, 무작위로 쏘아대는 화살을 피할 수 없다. 설익어 단단한 것들은 화살을 맞아도 끄떡없이 앳된 얼굴로 의기양양하다. 어느 정도 무르익은 것들은 쏟아지는 화살에 몸을 떤다. 스치듯 살짝 맞아도, 무른 살이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상처는 짓무르고 점점 커져만 갔다.



한동안 마른장마의 연속이었다.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살구에게는 축복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당분을 축적하고, 농부가 퍼 올려주는 지하수를 빨아 먹고는 몸뚱이를 불려 나갔다. 풋내나는 초록빛이 차츰 줄어들고 노란빛을 돌기 시작했다. 이제 수확이 멀지 않았다. 살구의 당도는 농익은 주황빛이 띨 때가 제일 높지만, 상품성은 노란빛을 띠고, 물컹하지 않을 때가 적기이다. 아버지는 살구밭에 물을 대면서 곧 있을 수확기를 기다리며 흐뭇해하셨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됐다. 비는 줄기차게 차창을 때렸다. 흐릿하게 보이는 차선의 흔적을 찾으며, 장대비를 뚫고 친정에 도착했다. 주인 없는 빈집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 오는데 어디 갔어요?”
“살구밭이야. 나오지 말고 집에 있어라.”
엄마 목소리에는 빗소리가 섞여 있었다.
“이렇게 비 오는데, 왜 그래요?”
엄마는 괜찮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살구가 뭐가 그리 중하다고. 엄마 옷장에서 색이 바랜 남방과 무릎이 나온 헐렁한 고무줄 바지 하나를 찾아 입었다. 신발장에서 엄마 장화를 꺼내 신고, 창고 처마 밑에 걸려있는 노란 우비를 걸치고 밭으로 갔다.
떨어지는 빗소리에 인기척이 묻혔다. 낮은 자세로 밭을 둘러보니, 살구나무 사이로 얼핏 두 사람이 보였다. 주춤거림 없이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왔다 갔다 했다. 오로지 살구를 따기 위한 집념만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흐릿한 시야에도 굵게 패인 주름이 도드라져 보였고, 눈두덩은 푹 꺼져 어두워 보였다. 검게 그을린 얼굴 위로 흐르는 빗물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왔냐. 집에 있으라니까.”
자신들이 비를 맞으며 일하는 건 당연하고, 자식이 비를 맞는 건 아까운 분들이다. 농군인 부모는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세세히 알려주려 하지 않았고, 철모르는 자식들은 농사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이 자신들처럼 살지 않길 원했다. 자식들은 땅을 파며 살지 말고, 책을 파며 살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자식 농사는 지어졌고, 자식들은 모두 일을 찾아 타지로 흩어졌다. 지금 부모 곁에서 농사일을 도울 자식은 아무도 없다.
비가 쉴 새 없이 어깨 위에서 타닥거렸다. 고개를 들어 높이 매달린 살구를 땄다. 비가 정면으로 날아와 얼굴에 떨어졌다. 빗방울이 목을 타고 비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안경을 벗어 닦아도 잠시뿐,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장화 속에도 빗물이 철벅거렸고, 발가락은 불린 듯이 퉁퉁해졌다. 빗물을 가득 머금은 밭이랑은 질척댔고, 파인 밭고랑을 따라 웅덩이가 생겨났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내려다보니, 노란빛이 가득했다. 가지를 잡아당겨, 노란빛을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바구니도 몸도 점점 무거워졌다. 비가 그치고, 따면 되지 않느냐고 우매하게 대들었다. 비가 퍼부어도 지금이 따야 할 시기니까 해야만 한다고 했다. 내 눈으로 살구의 상태를 직접 보고는, 삐죽거리던 입을 집어넣었다. 살구들이 예리한 칼에 베인 듯 상처가 나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살구들이 아우성쳤다. 떨어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곧 자신의 몸이 찢어질지도 모르는 순간을 맞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구세주처럼, 살구를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해 애썼다. 축축한 옷도, 뻐근한 자신의 몸도 잊은 채 나무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부지런히 따 모았다. 어머니는 속살이 드러난 살구들을 대할 때면,
“아이구. 어쩌나. 쩍쩍 다 갈라졌네.”
한탄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빗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거세졌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너라도 와서 다행이다.”
어머니는 감춰왔던 나약함을 슬며시 내비친다. 나는 농군의 자식이지만, 농사를 모른다. 일찍부터 부모와 떨어져 공부를 하고 직장을 다니고, 타지에서 살림을 차렸다. 농사짓는 부모의 고달픔이 내게 스며들 틈은 없었다. 부모는 자신의 고된 모습을 숨기고, 매번 괜찮다고만 한다. 전혀 괜찮지 않는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질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허물어지는 부모의 몸이, 하나씩 겉으로 드러날 때쯤 자식은 어쩔 줄 모른다.


비가 계속 왔다. 빗소리에 부모의 거친 숨결이 섞인 듯했다. 살구보다 중한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떤 방패막이도, 작은 우산조차도 되지 못한다. 그저 꿋꿋이 살구를 땄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맞춰 ‘똑, 똑’ 살구 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비가 온몸에 스며들어도, 멈출 수 없었다. 흙에 묻혀 살아오는 동안 갈라져 버린 손끝과 울퉁불퉁한 손마디, 고된 노동에 어그러진 뼈와 짓눌린 혈관들,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간당간당 붙은 힘줄과 닳아버린 연골.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빗속에서 버티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양손으로도 살구를 땄다. 아무리 애태워도, 하늘은 무심히 비를 뿌렸다. 무력하게 하늘을 쏘아본들 무슨 소용이랴.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살구를 다 딸 때까지 함께 비를 맞는 일뿐이었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부 / 김시헌  (0) 2024.02.07
포장마차를 타다 /심선경  (1) 2024.02.05
와이셔츠 / 정은아  (1) 2024.02.04
전등 / 정은아  (1) 2024.02.04
해지/정은아  (0) 2024.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