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 / 정은아
빛과 어둠. 켜짐과 꺼짐. 생과 사. 한순간인지도 모른다. 딸깍. 꺼져버린 빛이 불현듯 켜지길 기다렸다. 어둠 속에 머무르긴 싫으니까. 이미 빛을 잃은 생이, 다시 빛날 수 있을까. 무작정 주저앉아 기다릴 순 없다.
일으켜 세웠다. 아이가 걸을 수 없다며 다시 앉았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서 투정 부리는 거라고 여겼다. 아이는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아기가 되었다고 놀려도, 일어나지 않았다. 5살 아이를 업고 동네병원에 갔다. 고관절에 염증이 생겼다는 말과 함께 소염진통제를 처방받았다. 되도록 걷지 말고, 뛰지도 말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좋다고 했다. 아이를 다시 업었다. ‘보고 있는 거야? 애 낳고 한 달도 안 된 산모가 보이긴 해?’ 병원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실내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뒤돌아봤다. 모든 전구가 동시에 꺼졌다. ‘아이가 아프다니, 걱정돼? 집을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았으니, 우리가 궁금하긴 한가 봐.’ 얼마 걷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울컥 치밀어오는 감정을 잠재우려 아이를 벤치에 내려놓고 앉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영원(永遠)으로 출장 중인, 제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눈동자. 나는 별일 없다는 듯이, 네가 무거워서라고 했다. 아이가 세상사의 어둠을 알기엔 너무 이르다. 찬란하기만 한 유년의 빛 속에 아이를 좀 더 놓아두고 싶었다. 슬픔을 유예 시키면, 나중에 더 아플까, 덜 아플까. 나는 모른다. 해맑은 밝음 위로 드리우게 될, 어두운 그늘을 피하고만 싶었다. 아이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힌 아이는 어린이집 안 간다며, 신나서 쫑알거렸다. 장마가 자취를 감춘 쨍한 여름날, 식은땀과 눈물로 내 눈앞은 여전히 흐렸다.
억지를 부리고 싶었다. 단순한 정전이 아니라고. 전류로 인한 남편의 죽음이, 전류 속에 녹아 온 세상에 흐르는 거라고. 내 마음이, 나를 옭아매고 흔들었다. 원망과 미안함과 서러움, 혹은 분노, 불안, 좌절이 공존했다. 느껴본 적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그 후로는 전등의 깜빡임과 전기 오작동이, 남편이 내게 보내는 신호라 믿었다. 사망신고서를 접수하러 가는 길에서도 그를 만났다. 교차로의 모든 신호가 빛을 잃고 꺼져있었다. ‘당신이지?’ 빛을 잃은 무언가를 보면, 자꾸만 그를 씌웠다. 어쩌면 내 삶 속으로 그를 다시 끌어들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집안에 들어서면, 모든 사물이 온통 그로 넘쳤다. 같이 밥을 먹던 식탁에도, TV보며 뒹굴던 소파에도, 같이 잠들던 침대에도. 그는 보이지 않는데, 왠지 그가 보였다. 논리도 상실했다.
이사를 했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밤만큼이나 내 삶도 어두웠다. 갑자기 방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유난히 선명한 빛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현관 전등이 환했다. 누군가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켜지는 센서 전등이다. 서늘했다. 어떤 존재가 잠시 공간에 머물렀음을, 빛으로 알려주는 듯했다. 현관 쪽으로 가서 슬며시 중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어떤 개연성 없이 느닷없이 켜진 센서등. 도둑이었나. 문 열리는 소리도 없었는데, 그럼 누구지? 그다. 그 사람일 수밖에 없다. 센서등은 종종 이유 없이 켜졌고, 그때마다 나는 남편이 떠올랐다.
영화 「생일」을 봤다.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으로, 슬픔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일상의 표정을 잃었다. 현관 센서 등이 갑자기 켜지는 걸 보고, 아이가 온 것이라 생각하며, 허공에 말을 걸었다. 아이가 죽지 않았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표정이 밝았다. 아직 곁에 있다는 안도감과 반가움이었으리라. 영화 속 여자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발견했다.
늦은 밤이나 새벽/ 아무런 기척도 없는데/ 현관 센서등이 반짝 켜지곤 했지요?//
놀라지 마세요/ 어머니 저예요//
이제 저는 보이지 않게 가고/ 보이지 않게/ 차려 놓으신 밥을 먹고/ 보이지 않게/ 어머니를 안아요//
다시 놓지 않으려/ 당신을 꼬옥 안아요/ 그때, 센서등이/반짝 켜지는 거예요//
-영화 「생일」에 나온 시 「엄마, 나야」 중에서
왜 고작 ‘전등’에 기대는 걸까. 사람들은 죽음을 마주하기 전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입에 올리는 것도 꺼린다. 삶과 죽음이 한 세트로 묶여있어도, 항상 삶만 보이고, 죽음은 삶 뒤쪽에 가려져 있다. 그래서 죽음은 낯설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무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수시로 생소한 감정들이 솟아올랐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표정을 지웠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갑작스러운 이별은 마지막 인사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떠나간 이도, 떠나보낸 이도 못다 한 말이 마음에 남았다. 상대를 잃어버린 말들이 전등과 마주쳤는지도 모른다. 전등은 남겨진 마음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아니었을까.
사별 후, 한동안 정체된 시간에 갇혀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없는 삶을, 다시 살아내기 위해 버틴 시간이었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내게 소중했던 사람이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사라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게 마음이 편하다. 애도는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흘러간다. 나는 서서히 그를 놓아주고, 내 표정을 되찾아야 했다. 남은 자에게는, 아직도 살아가야 할 시간이 남았으니까.
아직도 가끔 전등에 반응하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온전히 그를 전등에 씌우진 않는다. 그래도, 살다가 기척도 없이 남편 생각이 번쩍하고 켜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잠시 ‘그’라는 전등을 켜두면 되겠지. 어찌 보면, 살면서 마음속에 전등 하나 가지고 사는 것도 괜찮은 삶이지 않은가. 다시 내 삶에도 빛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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