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셔츠 / 정은아
언젠가 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한 남자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아내가 그리울 때마다 옷장을 열어 아내의 옷을 쓰다듬고, 입어보는 장면. 남겨진 이의 아픔과 그리움이 처절하게도, 괴이하게도 보였다. 왜 저렇게도 잊지 못할까? 그때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남편이 한마디 말도 없이 내 삶에서 빠져나갔다. 칫솔, 스킨, 로션, 면도기, 속옷, 티셔츠, 남방, 바지, 벨트, 점퍼, 정장, 코트, 양말, 운동화....... 그의 물건들도 그를 따라 사라졌다. 서로를 지탱하며 걸어갈 삶은 아직 초입인데, 나와 아이만 길 위에 남겨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이들에게는 언제, 어떻게, 어떤 얼굴로 설명해야 하나. 남편이 사라진 날 이후로, ‘아빠는 출장 중’이어야 했다. 아이가 아빠를 찾으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둘러댔다. 아이에게 말하듯, 나도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제발 꿈이었으면….’ 밤마다 빌었다. 아침이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나를 깨웠다.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하면 할수록, 아이에게 거짓을 말하기가 힘들었다.
한 달이 지나갔다. 눈이 부셨던 오후. 큰아이를 불러 내 무릎에 앉혔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 눈과 맞닿은, 티 없이 맑기만 한 아이 눈은 무방비 상태였다.
“너무 놀라지는 마. 엄마가 옆에 있잖아.”
흐려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한 달간 고심했던 말을 들려줬다.
“아빠는 하늘나라에 먼저 갔어. 언젠가 우리도 거기에 갈 거야. 아빠가 일을 잘해서 하늘나라에 꼭 필요하다고 데려갔나 봐. 아빠가 열심히 살다가 하늘나라 갔으니까, 우리도 아빠처럼 열심히 살아야 같은 곳에서 만날 수 있어.”
아이 눈이 점점 동그래지더니, 소리 내어 울었다. 나도 참지 못하고 훌쩍였다. 5살 아이가 죽음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죽음이란 단어에 부합하는 질문을 찾으려는 듯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차 사고 났어?”
“아니, 회사에서 일하다가 사고가 났어.”
“어떤 일?”
“전기 일.”
아이는 글썽이는 눈으로,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듯 몇 번을 되물었다.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실 앞에서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울음뿐이었다.
“나는 아빠가 출장 간 줄 알았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미안해. 이제야 얘기해서.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 아빠가 일찍 가버려서 엄마도 슬퍼.”
졸지에 아비를 잃은 어린아이의 심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든든한 부모 아래 자란 내가 무얼 알겠는가. 그저 아이를 내 품에 안았다. 점점 가슴 언저리가 축축해졌다. 어느 순간, 아이의 울음은 잦아들었고, 벌떡 일어나 동화책을 들고 왔다. 나는 평소처럼 아이에게 책을 읽어줬다. 아이도 별일 없었다는 듯이 내가 읽어주는 책을 보고 있었다. 책 중에는 아빠를 잃어버린 어린 말 이야기책도 끼여 있었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어린 말이, 순간순간 아빠를 떠올리는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린 말은 어느덧 자라, 아빠처럼 멋진 말로 성장해 힘차게 초원을 달렸다. 큰아이와 나는 계속 책을 읽었고, 작은 아이는 배냇짓을 하며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우리는 살아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도 남은 사람의 삶은 이어지니까. 눈을 돌릴 때마다 그의 흔적이 곳곳에 달라붙어있는, 우리 집을 떠나 친정에 머물렀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내가 아이들을 돌봤다기보다, 아이들이 나를 돌봤던 것 같다. 혹시라도 엄마가 정신 놓을까 봐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갓난쟁이 둘째 아이는 울면서 꾸준히 나를 단련시켰다. 넋 놓고 있지 말라고,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고. 모유 달라고 보채고, 기저귀 갈아 달라고 울고, 재워달라고 칭얼댔다. 첫째 아이는 내가 마음 놓고 울 수 있게 도와줬다. 아빠와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아이라, 잘 놀다가도 갑자기 아빠가 보고 싶다며 울곤 했다. 아이를 달래다가 때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이를 껴안고 같이 울었다. 우린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독이며 애도의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밤이 되면 잠시 잊고 있던 상실 조각들이, 어둠 속에서 또렷한 빛을 발하는 별처럼 머릿속에 점점이 박혔다. 숨죽이며 훌쩍이다 희붐히 날이 밝아오면, 내 옆에 잠든 아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다. 점점 흐릿해지는 남편 얼굴이 아이들 얼굴로 되새김 되었다.
그와 살았던 우리 집을 정리했다. 장례식 때, 엄마는 사위 옷을 정리해 화장터에 보냈었다. 남겨진 흔적 속에서 딸이 힘들어할 것을 예견하고, 어서 털고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했었겠지. 옷장에 남은 내 옷은 이삿짐센터 차량에 실려, 친정에서 가까운 낯선 집에 방치되었다. 어느 정도 삶의 균형을 맞출 힘이 생겼을 때, 친정에서 독립했다. 고요한 밤. 큰아이 유치원 입학식에 입고 갈 옷을 찾으려고 옷장을 열었다. 반쪽이 빠져버린 옷장엔 공간이 남았다. 코트들을 뒤적이는데, 흰색이 보였다. 옷을 밀쳐보니, 와이셔츠였다. 그는 반소매를 입을 땐 105치수인데, 긴소매를 입을 땐 팔이 길어 110치수를 입어야 했었다. 유달리 길어 보이는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반가움과 원망이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가, 잠잠히 고여 있던 마음 밑바닥을 뒤흔들었다. 부둥켜안았다. 어쩔 도리가 없다. 그냥 와이셔츠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 밖에.
몇 년 지난 후, 아이들에게 와이셔츠를 보여줬다. 아빠가 입던 와이셔츠야. 입어 봐. 진짜 크지? 진짜 아빠 와이셔츠야? 그래, 너희 아빠가 이렇게 팔이 길었단다. 너희도 유난히 팔이 길잖아. 아빠 닮아서 그런 거야. 엄마, 와이셔츠가 이불 같다. 아빠는 키도 크고 덩치도 컸어. 그래서 아빠가 엄마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다고 했지. 아빠 구두도 하나 남아있어. 볼래? 발도 엄청 크단다. 엄마, 이건 보트 같아. 그러게. 발사이즈가 280이었단다. 너희 손발이 큰 것도 아빠 닮아서 그래. 둘 다 아빠를 참 많이 닮았어. 짤막한 엄마를 안 닮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둘째 아이는 롱드레스 같은 와이셔츠를 입고, 재미있다는 듯이 팔을 휘적휘적했다. 첫째도 입어보겠다며, 와이셔츠를 빼앗아 걸쳤다. 아이는 빈 공간을 메우려는 듯이, 팔다리를 ‘大’자로 뻗으며 제 몸을 부풀리고 늘렸다. 공기가 빠져 쪼그라든 풍선처럼 ‘아빠’라는 존재가 빠진 와이셔츠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도 와이셔츠를 입은 아이는 아빠 품을 기억해내려는 것처럼, 팔을 둥글게 모았다. 그리곤 어깻죽지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아빠 냄새나는 것 같아.”
오랜만에 와이셔츠를 꺼냈다. 남편의 몸이 머물렀던 곳에 내 팔을 집어넣었다. 헐렁한 공간만큼 마음이 휑했다. 와이셔츠는 세월 따라 흰빛을 잃고, 누렇게 색이 바랬다. 내게 남은 남편의 기억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그래도 문득문득 흔적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가슴팍에 남아있는 작은 얼룩 하나. 그는 여기에 무얼 흘리고 간 걸까. 말해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