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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태양초/김덕임

에세이향기 2024. 3. 8. 09:12

 

태양초/김덕임
                                                                               

주머니 속 금화가 잘랑거린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순천 시댁에 다녀왔다. 바삭한 고추 삼십여 근을 오부룩이 부었다. 작은 산더미만하다. 새 색시 다홍치마 같은 태깔이 손끝에 자르르 감겨온다.
 고추 꼬투리를 떼어낸다. 벌써 두어 시간째다. 떼어낸 꼬투리는 흡사 생후 이레 만에 말라 떨어진 딸들의 탯줄이다. 코끝의 알싸한 냄새는 연신 재채기를 끌어올린다. 콧물이 눈물인지, 눈물이 콧물인지…. 고추 속에는 초가을의 말간 햇살이 불룩이 담겨 오글거린다. 순천만 수평선에 낭자한 저녁노을도 들어있다. 그뿐이 아니다. 고추는 해풍에 실려 온 달착지근한 새조개 냄새와 쫄깃한 쭈꾸미 맛도 담뿍 담고 있다. 고추밭을 병풍처럼 둘러친 산자락 속의 소쩍새, 멧새들의 울음소리도 고추더미 속에서 잔망스럽게 들린다. 먹물 같은 어둠에 잠긴 밤, 고추밭 고랑에 쏟아져 와글거리는 별들의 수다도 버석거리는 고추 사이에 아스라하다. 
 유난히 비가 많은 올해, 이렇게 고운 고추와 대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어머니의 정성 때문이다. 하루걸러 내리는 장대비 속에서, 널었다 거두기를 수 없이 반복하신 어머니의 굽은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다 못해 기역자가 되었다.
 “꼬치는 볕에 말려야 꼬치장도 곱고, 겨우내 맛난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겨.”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의 변함없는 신조다. 그래서 건조기에 말리는 손쉬운 방법을 마다하고, 굳이 멍석 위에 고인 햇살로 말리기를 고집한다. 고추 하나가 열리고, 익어서 딸 때까지 어머니의 갈퀴 같은 손길은 쉴 새 없이 고추와 함께 한다.
 해동한 땅의 들숨과 날숨이 새순마다 자욱이 얹힐 때, 어린 고추모종을 심고 보드라운 흙으로 도도록이 북을 돋워준다. 갓난아이 같은 모종에 버팀대를 세워 묶어준다. 어린 모종은 자글거리는 삼복 햇살에 짓눌려, 잎을 축 늘어뜨리고 목말라 한다. 배고파 자지러지는 아이에게 서둘러 저고리 섶을 걷어 젖을 물리듯, 어머니는 손 빠르게 물 호스를 늘인다. 고추 모는 시원한 물을 불룩하게 빨아먹는다. 시들었던 고춧잎들은 금방 팔랑팔랑 깃을 세운다.
 김을 메주고 거름을 주고, 간간이 살충제 ‘파라치온’도 연하게 물에 타서 뿌려준다. 여린 모종은 어머니의 정성에 짱짱한 고추나무가 된다. 초여름이면 하얀 나비 떼 같은 꽃을 피워 들판이 장관이다. 산과 들이 진초록으로 바뀔 때면, 하얀 꽃이 진 자리마다 갓난아이 손가락 같은 고추가 조롱조롱 맺힌다.       
 툇마루 끝에 매달려 있던 햇발이 마루 깊숙이 들어앉을 때, 고추는 순천만 수평선을 넘어오는 산들 바람에게 토실한 알몸을 내맡긴다. 귓불을 태운다. 고추는 온통 노을빛으로 짙게 물든다. 고추밭이 붉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모지라진 손끝은 더욱 바빠진다. 싱싱한 고추를 소쿠리 가득 따며, ‘사랑스럽다’를 반복하는 어머니. 골 깊은 구릿빛 이마에는 차진 웃음이 고인다.
 서른 두 해전에 큰 아이를 가졌을 때 일이다. 밥을 먹다 말고 입덧이 심한 새 색시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왝왝거렸다. 어머니는 텃밭으로 내달려 풋고추를 한 움큼 따왔다. 그리고는 내 키만큼 크고 투박한 항아리에서 곰삭은 된장을 떠다가 푹 꽂아주었다. 알큰한 풋고추 냄새가 미식거리는 오장육부를 순식간에 잠재웠다. 시원한 우물물에 찬밥 말아서 게눈 감추는 듯했다. ‘고추 꼬투리 같은 탯줄을 타고 들어간 알싸한 풋고추 맛에, 계란만한 태아가 놀라지나 않았을까?’ 허기를 한껏 채우고 그제야 햇병아리 모성이 살아났다. 삼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철부지 며느리를 흐뭇해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잊을 수 없다.
 그 해에 나는 딸을 낳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도 딸이었다. 그래서 시아버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지 못했다. 아버님은 산달이 되면 매번 튼실한 새끼줄을 꼬아 놓고 기다렸다. 그러나 거기에  붉은 고추와 숯덩이를 끼운 금줄을 삽짝에 내거는 기쁨을 끝내 누리지 못했다. 붉은 고추더미 위에 지금은 뵐 수 없는 아버님의 모습이 클로즈 업 된다.
 꼭지를 다듬은 태깔 자르르한 고추는 단골로 다니는 방앗간에서 곱디고운 가루로 변신했다. 방앗간 아주머니는 고추 빛깔이 참 좋다고 연신 뒤적인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나고 자라 익었으니 오죽할까. 고추는 이제 자신을 값없이 주기 위해 부서질 준비를 한다. 비장한 모습이다. 애잔한 눈길을 차마 볼 수 없다. 고추는 기계 버튼 누르는 소리를 신호로 하여, 바스러지는 고통을 입에 물고 분쇄기 속으로 인해(人海)처럼 달려든다. 소리 없는 그들의 아우성이 고막을 찢을 듯이 귓가에 매달린다.
 김장철이 되면 고춧가루는 배추 속 갈피갈피에서 매운 맛을 삭힌다. 조기 매운탕에 솔솔 뿌려진 칼칼한 맛은, 더위에 시든 사위들의 입맛에 생기를 얹어준다. 갖은 야채와 어우러진 얼큰한 고추장 불고기는 학업에 지친 막내딸의 구미를 돋운다. 
 어머니의 태양초는 많은 사람에게 칭송을 듣지만, 끝까지 자만하지 않는다. 윤기 나는 자태는 육중한 기계 속에서 가루로 부서져 오롯이 간 데 없다. 그러나 그들은 서러워하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입에 발린 얄팍한 공치사는 한사코 손사래로 사양한다.
 탐스럽던 줄기와 잎과 열매를 다 내려놓는다. ‘만물의 영장’이랍시고 내 것도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인 양 판치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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