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
김응숙
도시의 뒷골목은 남루하다. 밤이라면 그것은 체념의 시간이 흐르는 너절한 도랑이 되고 비까지 온다면 허무가 떠다니는 오염된 하수구가 된다. 늦가을 찬바람마저 불어대는 오늘, 화장 짙은 여자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처럼 비는 번들거리는 얼룩을 남기며 어두운 골목을 내달리고 있다.
어쩌다가 길을 잘못 든 것일까. 비안개에 희뿌연 빛을 분사하는 백열등이 전봇대에 붙어 있다. 빌딩 뒤편에 설치된 여러 구조물들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일렁거린다. 그 틈새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납작 엎드려 있다. 곰팡이들이라도 퍼져 있는지 큼큼한 냄새마저 난다.
고개를 들어보니 골목의 저 끝, 어둠이 갈라진 직사각형의 빛 속에서 우산을 쓴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흡사 멀리서 보는 전광판 화면 같다. 발밑의 웅덩이를 피해 가며 걷는다. 이따금 부딪히는 행인의 어깨에서 피곤의 단내와 버무려진 짙은 술 냄새가 빗방울에 섞여 후드득 떨어진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맞부는 바람 때문인지 골목은 길기만 하다.
유독 길치인 나는 가끔씩 이런 실수를 해서 곤욕을 치르곤 한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다. 우산을 돛대 삼아 걸쭉한 어둠을 밀어내며 빛을 향해 나아간다. 귀마개를 떼어냈을 때처럼 갑작스레 커진 소음과 함께 나는 빛 속으로 들어선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커피숍은 내가 돌아 나온 뒷골목의 앞쪽에 위치해 있다. 유명 브랜드 로고의 간판이 빛난다. 나무로 정갈하게 꾸민 테라스를 자주색 차양이 깊숙하게 덮고 있다. 덕분에 가게 전면을 차지한 통유리에는 빗물 한 방울 튀지 않는다. 은은한 커피 향과 빵 굽는 고소한 냄새가 빗줄기 사이로 연기처럼 퍼져 간다. 날개를 단 전등이 아기 천사처럼 날고 있는 실내는 밝고 안온해 보인다. 조금은 성급하게 장식된 꼬마전구들이 벌써부터 연말 분위기에 흥겹다.
이곳만이 아니다. 대로를 따라 즐비한 가게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오로지 오늘의 행복만이 현란한 불빛을 타고 넘쳐난다. 내가 길을 돌아 나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휘황한 거리의 뒷면이 바로 그 어두운 뒷골목이라는 것을.
며칠 전에 서점에 들른 적이 있었다.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성공비결을 담은 책들이 즐비했다. 그 책들은 특별히 설치된 조명 아래에서 금은방의 보석들처럼 반짝거렸다. 그런데 출구 근처 계단 아래에 반액 세일하는 책들이 나무 상자에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는 얼마 전에 자살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행복 전도사의 저서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표지에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독특한 어투와 열성적인 입담으로 행복을 전파하던 그녀의 책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되어 있었을 것이다.
흔히들 빛이 밝으면 어둠이 짙다고 한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다고도 한다. 자연의 이치를 이르는 말이다. 모두가 성공과 행복을 향해 달려가지만 모두가 그것을 성취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성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도 하다.
빛을 향해 질주하기 위해 드러낼 수 없었던 감정들이 어두운 뒷골목에 팽개쳐져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그것들이 양지로 나올 기회를 잃고 곰팡이 포자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 뒷골목을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또한 무수한 뒷골목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적 상실감과 이기심, 공포와 불안, 원초적인 쾌락에 대한 갈구, 뒷골목에 퍼져 있는 곰팡이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기만 하다. 그 어두운 골목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가끔씩은 자신의 뒷골목을 청소해야 할 필요가 있다. 너무 어둡지 않게, 너무 음습하지 않게 말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방범등도 달고, 순찰을 도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싶다. 그리고 감정의 찌꺼기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가벼운 일탈이라도 감행해 포자가 터져 곰팡이가 창궐하지 않도록 해소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이리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유리창에 비친다. 오늘은 친구에게 나의 뒷골목에 대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진다. 친구는 이런 나를 받아 주고 이해해 줄까. 나를 발견한 친구가 가볍게 손을 흔든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행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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