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 / 최재영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인품 좋은 종가집 장독대에서
반질반질 몇 해를 보냈는지 알 수 없어요
미세하게 실금을 틔우고 아무것도 담을 수 없을 때
칠흑같은 어둠과 고요만이 남게 되었죠
덕분에 나는 아름다운 몇 날을 뒤척여
안팎 온 몸이 간지러운 듯 새들을 불러들이곤 해요
이제 봄을 기억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안에서 피고 지는, 아직도 나를 관통해가는 세월이죠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대를 이어가는 건 화려한 혈통만이 아니라는 것을,
내 안에서 부풀어 오르던 달빛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고
제 집처럼 드나들던 바람도 슬슬
이 빠진 소리로 흥얼거리는군요
나는 앞으로 몇 번의 호시절을 더 노래하게 될까요
나의 달빛은 강물처럼 흘러 어디에 가 닿을까요
수천의 봄날이 지난 뒤에
수줍은 새색시 가슴처럼 혼미한 숨결로나
만나볼까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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