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춘자 고모/이상은
대구로 가는 완행버스가 돌무리(고향 동네 옛 지명) 앞에 도착하자 보따리를 든 동네 아낙네들이 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마 다음 차 타소 아지매들. 이러다 터져 죽겠소. 고추 팔아봐야 얼마 된다고.”
열 대 여섯 살이나 되었을가 싶은 안내양이 차창 밖으로 목을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그럼 밭에 썩도록 두냐. 이년아. 대가리 피도 안 마른 년이 차장이 벼슬이다. 벼슬. 목구멍에 밥이 어째 들어가는지 모르고. 어서 문이나 열어.”
절름발이 율리댁이 안내양의 말을 되받아쳤다.
“아지매. 너무 그러지 마소. 나도 고향 가면 아지매 같은 엄마 있소.”
버스 문이 열렸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탈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율리댁이 앞장을 섰다. 아낙네들이 힘을 다해 버스 안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먼저 보따리를 밀어 넣고 몸을 구겨 넣었다. 버스 안 여기저기서 이러다 사람 죽겠다고 악다구니가 터져 나왔다. 차장이 좌석 팔걸이를 딛고 올라섰다. 안내양이 승객들을 내려다보며 다 같이 좀 먹고 살자고 그러는 것이니 조금씩만 양보하자고 나이답지 않게 되바라진 훈계를 했다. 대강 정리가 된 듯하자 차장이 버스 벽을 탕탕 두드렸다. 버스가 움직이기 천천히 시작했다. 운전기사가 몇 번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버스가 휘청거렸다. 승객들은 힘없이 뒤쪽으로 밀려들어가 빼곡히 채워졌다. 버스 안은 잘 채워진 쌀부대 같았다. 승객들은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승객들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춘자야. 저녁해라. 너 아부지 배고프다.”
율리댁의 목소리가 차 밖으로 길게 들려왔다.
“엄마. 내가 말한 거 꼭 구해 와야 해.”
버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떠났다. 마른 흙먼지가 버스 꽁무니를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갔다. 춘자 고모는 찻길 옆 풀 섶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동네는 너무 답답해."
춘자 고모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들판은 온통 푸른색이었다. 논 가운데 간간히 사람들이 보이긴 했지만 너무 느리게 움직였다. 마치 모든 것이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네 앞 전봇대에 매달린 확성기에서 귀고막이 찢어질 듯한 잡음이 터져 나왔다.
“아._ 아._ 동민 여러분. 잘 들리시지요. 동장입니다.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가까운 지서나 동장인 저에게 신고 해 주십시오. 그라고 아침저녁으로 풀 한 짐씩 합시다. 퇴비 좀 많이 해주세요. 내일 면사무소에서 조사 나온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오늘 저녁에 동네 대항 노래 자랑 콩쿠르가 있습니다. 작년에는 율리댁 장녀 춘자가 일등을 해서 우리 동네의 명예를 더 높였습니다. 아._ 아._ 그라고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번에 일등상을 받으면 가수를 시켜준다고 합니다. 오늘 저녁 많이 참석하셔서 우리 동네 대표를 응원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춘자는 고모는 벌떡 일어섰다. 확성기 쪽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수상한 사람이 어디 있어. 제발 수상한 사람이라도 좀 봤으면 좋겠다. 뭐 풀 베라고? 여름 내내 눈만 뜨면 퇴비 타령이야. 이제 갖다 놓을 자리도 없다. 에라. 소똥이나 밟고 자빠져라. 콩쿨은 무슨 콩쿨. 이 머리를 해 가지고 어쩌라고. 이제 다 틀렸어.”
춘자 고모는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벗어 땅바닥에 내던졌다. 짧고 삐죽삐죽한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내 새끼손가락 길이보다 짧았다.
춘자 고모는 내 고향집 옆집에 살았다. 춘자 고모네집와 우리집은 대문을 서로 비스듬히 보고 서 있었다. 일가(一家)는 아니었고 내 고모와 동갑내기 친구였다. 대구로 가는 버스가 지나갈 시간이면 춘자 고모는 마당 구석에 놓인 평상에 올라 목을 길게 빼고 큰 길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가끔 그 옆에서 서서 춘자 고모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춘자 고모는 꿈을 꾸는 듯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다 버스가 지나가면 힘없이 주저앉았다.
“저 버스를 타고 가면 극장도 가고 가수도 될 수 있을 텐데. 너 고모는 좋겠다. 대구서 공장 다니잖아.”
춘자 고모는 나에게 넋두리를 하곤 했다.
평상은 춘자 고모의 연습장이자 무대였다. 흥이 나면 가랑이가 넓은 바지와 젖가슴이 보일 듯한 블라우스를 차려 입고 나왔다. 나는 춘자 고모의 화려한 공연 의상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은밀한 관객이었다. 콩쿨이 열리기 며칠 전이였다. 춘자 고모는 그 날도 평상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를 보자 동네 어른들이 어디에 모여 있느냐고 물었다. 동네 어른들은 늘 그런 것처럼 구판장에 모여 있었다. 춘자 고모는 나를 앞세우고 구판장으로 향했다. 춘자 고모는 아버지 율리 어른이 오는지를 잘 지켜보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나는 그 순간 우리 동네에서 제일 예쁘고 노래를 잘하는 춘자 고모를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키다리 미스터 김은 싱겁게 키는 크지만 ... 키다리 미스터 김에게 나홀랑반했어요.” 춘자 고모는 동네 어른들 앞에서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불렀다. 춘자 고모는 콩쿨 대회 연습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낯선 아저씨의 취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춘자 연애 한번 하세. 나도 키 큰 미스터 김이여. 엉덩이 한번 크네.”
“너 뭐라고 했어. 남의 동네 왔으면 고이 술이나 처먹다 갈 것이지. 이 자식이.”
술상이 엎어졌다. 춘자 고모네 일가(一家) 남자였다. 이웃 동네 아저씨는 김씨네 일가 남자들에게 멱살잡이를 당하고 자전거를 버려두고 도망을 쳤다.
그 날 해질 무렵이었다. 율리댁 어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춘자 고모는 평상 위에 앉아있었다. 율리 어른은 춘자 고모의 등을 손바닥으로 후려 갈겼다.
“공장도 안 보내고 들일도 안 시키는데 뭐가 불만이여. 곱게 있다가 시집이나 갈일이지. 가수는 무슨 가수. 촌년이 뭘 안다고. 노래 잘 해봐야 술집 작부 밖에 더해. 미친년.”
춘자 고모는 이를 악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분을 참지 못한 율리 어른이 다리를 부르트려 놓겠다며 지게 작대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춘자 고모 어머니가 다리를 절뚝이며 달려와 앞을 가로 막았다.
“이러지 마소. 나도 절름발이 몸으로 시집와서 당신 따라 다니며 일하느라 나도 고생 많이 했소. 나도 어릴 때 대구에 살았으면 다리병신은 되지 않았고 합디다. 나도 촌구석이 지겹소. 춘자는 오죽 하겠소. 하나 남은 성한 내 다리 작살내시오. 대신 춘자는 때리지 마시오. 내가 저년 어디 못나가게 머리 홀랑 깎아 버릴 테니 제발 때리지는 마소. 세상이 변하는데 당신이 춘자 잡은들 무슨 소용이 있겄소.”
율리 어른은 지게 작대기를 내던지고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막걸리를 연거푸 부어 마셨다. 춘자 고모 어머니는 춘자 고모의 윤기 나고 긴 머리를 가위로 숭덩숭덩 잘랐다.
“이년아 그래도 집이 좋다. 니가 대구 가면 식모나 직물 공장 공순이 밖에 더 되겠냐. 사람 섬기기도 힘든데. 공장가면 기계를 섬겨야 해. 기계는 잠도 없다더라.”
나는 우리 집 대문 뒤에 숨어 춘자 고모를 몰래 지켜보았다. 춘자 고모의 눈물이 평상 위에 떨어졌다. 춘자 고모는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춘자 고모는 그 날 후로 평상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버스가 올 시간이 되어도 큰 길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_ 아._ 동민 여러분. 동장입니다. 편안히 잘 주무셨습니까? 오늘은 면사무소에서 퇴비 조사를 나옵니다. 퇴비장 정리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어제 콩쿠르는 사고 없이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아쉽게도 우리 동네에서 일등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섭섭합니다. 일등 곡은 키다리 미스터 김입니다. 빵떡모자에 검은 안경을 쓰고 시원한 옷차림의 짧은 머리 멋쟁이 아가씨였습니다. 많이들 즐거우셨으리라 믿습니다. 율리댁 장녀가 출전하지 못해 많이 아쉽습니다. 그라고 수상한 사람 보이면 지서로 신고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일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춘자 고모는 콩쿠르 대회 다음날부터 동네에서 보이지 않았다. 이웃동네 총각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장교가 된 오빠 집에서 미용 기술을 배운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 후로 대구에서 오는 버스가 들어올 시간이 되면 율리 어른은 평상 위에 올라가 큰길 쪽을 바라보았다. 가끔 밤늦도록 대문을 열어 놓고 늙은 소처럼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지들이 뭘 알아. 노래는 우리 춘자가 일등이여. 못된 년 손가락이 부러졌나. 편지라도 한 장 하지. 밥이나 먹고 다니는지... ”
나도 10 여년 후 완행버스를 타고 돌무리를 떠났다. 오래전의 일이다. 7월 이였나. 8월 이였나. 꽤나 더운 여름이였다. 나는 아직도 노래 잘하고 엉덩이가 큰 여자를 보면 가끔 춘자 고모를 떠올린다. 안녕, 춘자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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