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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폐타이어 / 임수진

에세이향기 2021. 8. 23. 06:37

폐타이어 / 임수진

 

 

 

 

거실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일직선을 이룬다. 나는 트레이닝 복장에 운동화를 신는다. 그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6시지만 하늘은 아직도 오렌지색 발을 드리워 놓고 있다. 그 사이로 아이들을 실은 학원차가 지나가고 키가 큰 젊은 남자가 지나가고 등이 굽은 노인이 지나간다. 나는 붉은색 장미꽃이 만발한 아파트 담장 아래를 천천히 걷는다. 내 곁으로 자전거를 탄 남자아이가 지나간다. 나는 아이의 정수리에서 펄럭이는 햇살을 본다.

석양이 서쪽 하늘 깊숙한 곳에 둥지를 틀자 퍼져 있던 빛들이 일제히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빛은 담벼락으로부터 조금씩 걷혀질 것이다. 동쪽으로부터 시작된 긴 여정이 마무리되는 시간이다. 마음이 정리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태양은 달아올랐던 지붕을 흥분시키지 않고 식히는 법을 알고 있는 듯 여유를 부린다.

아이들의 웃음이 여유처럼 울려 퍼지는 초등학교 운동장 한 귀퉁이에 반신을 드러낸 타이어들이 묻혀 있다. 복제된 듯 똑같은 그가 열 개다. 나란히 일렬종대로 엎드려 해바라기 하는 모습도 영락없이 닮았다. 이곳은 그가 달리는 일에서 손을 뗀 후 터전을 잡은 곳이다. 둥근 몸을 정확히 반등분하여 반은 땅 속에 반은 땅 위에 내놓았다. 이 일에 그의 의지가 반영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역시 청량감 넘치는 아이들의 웃음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가 자동차에서 분리되던 순간을 기억한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정지선을 넘어서는 일이 잦았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자꾸 헛발질을 해댔다.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닳아버린 지문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는 과로 탓이려니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 상태라면 뾰족한 것에 스치기만 해도 찢어질 수 있다. 만약 비슷한 일이 또 생긴다면,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날 장대비가 쏟아진 건 불행이자 행운이었다. 아무도 그의 눈물을 눈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수리가 되지 않는다. 언뜻 보면 탱탱해 보이지만 더 이살 달릴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거칠게 항의하며 온몸으로 저항해 보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답답한 그는 버럭 소리를 질러본다. 메아리도 없다.

집과 상점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골목길도, 땡볕으로 달아오른 한 여름의 아스팔트도, 눈 쌓인 산간도로도, 젊은 그에겐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렇게 달릴 수 있는 몸이 자랑스러웠다. 달리는 일에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것에 감사했다. 달리는 일이야말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그 일에 있어서만큼은 최고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정말 성실하게 닳고 닳았다. 그렇기 때문에 충격은 더 컸다. 일해 온 시간에 비해 무너지는 건 순간이었다. 그는 존재적 가치에 비애를 느꼈다.

그가 속도에서 발을 내린 순간 도로를 질주할 때의 짜릿함도 호수 주변을 드라이브할 때의 낭만도, 고속도로 휴게소 풀밭에서 울어대던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모두 파랑 같은 추억이 되었다. 사실 유쾌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르막길을 오르며 투덜댄 적도 있었고 먼지투성이 몸으로 도시 한복판을 굴러다닐 때는 부끄럽기도 했다.

바람이 그의 몸을 현악기인 양 타고 논다. 늘 예정된 곳을 향해 바삐 움직이는 몸, 이제 그 몸에 무한한 자유가 내려졌다. 처음 느껴 보는 여유. 그런데 그 자유가 편한 것만은 아니다. 불안하고 어색하다. 그는 닳아서 매끈한 피부를 만져본다. 언제 이렇게 닳았을까. 그는 비로소 닳기 전의 몸이 얼마나 건강하고 멋졌던가를 깨닫는다. 아름다웠던 시절, 그때는 왜 그걸 느끼지 못했을까.

그는 여전히 ‘폐’라는 수식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냥 ‘타이어’로 불리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속도의 욕망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타이어에 공기압을 탱탱하게 주입해서 도로를 질주하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몸의 절반이 땅 속에 묻혀 있어도 꿈은 정대로 묻히는 법이 없으니까. 묻히지 않은 몸이 묻힌 몸을 기억하는 이상, 묻힌 몸과 묻히지 않는 몸이 만나 온전한 둥근 원을 꿈꾸는 이상 그는 폐타이어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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