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만리 바람소리 / 박월수
처마 끝 풍경이 밤새워 운다. 나도 잠 못 든 채 양철로 된 물고기가 되어 바람을 맞는다. 풍경에 매달린 몸이 어지럼을 탄다. 불면에 시달린 내 늑골에는 하염없이 더운 바람이 인다. 거실로 나와 창문을 연다. 뒷산 은사시나무 숲을 헤집던 바람이 왈칵 밀려든다. 불면을 부채질하던 바람에도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엔 모자란데 거친 바람결에 꽃 지는 소리 들린다. 봄이 간다는 기별인가 보다. 문득 가야할 곳이 떠올라 카메라를 챙기고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곶은 바다가 뭍으로 가고 싶어 긴 팔을 뻗은 곳이다. 절절한 그리움으로 바다가 빚어낸 뭍의 형상이다. 어찌 보면 애착의 경계인 듯한 호미곶 언저리에는 구만리 언덕이 있다. 나는 멀고 아득한 땅에 사는 바람을 만나러 간다. 그득히 피어난 청보리를 껴안고 악보 없이도 노래하는 바람을 보러간다. 바람과 보리가 한데 엉긴 몸짓이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곳으로 간다. 바다는 바람의 힘을 빌려 습기 품은 비릿한 냄새를 언덕으로 보내놓고 하얗게 팔랑이며 보리물결을 넘겨다 볼 것이다. 이맘땐 호미바다도 나처럼 구만리 언덕에 몸을 섞고 싶어 안달이 난다는 걸 짐작으로 안다.
내쳐 달려온 구만리 언덕엔 우르르 바람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나는 예의를 갖추듯 낮게 엎드리며 사진을 핑계 삼아 보리밭에 스며든다. 보리가 춤추는 걸 찍는 동안 바람은 카메라를 거쳐 내 몸을 골고루 관통해 갈 것이다. 몸에 걸친 긴 재킷이 펄럭거리며 소리를 보탠다. 땅과 바다가 뜨겁게 부둥켜안은 호미곶 끄트머리 구만리 언덕에서 해종일 바람을 맞는다. 간 밤 몸속을 유영하던 더운 기운은 흔적을 감췄다. 어쩌면 내가 자꾸 열이 난다고 생각하는 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산속에서 귀로만 듣던 바람과는 다른 융숭한 움직임이 물컹물컹 나를 만진다.
구만리 언덕에선 옷자락을 여밀 생각일랑 아예 말아야 한다. 무엇이든 여며야할 것이 있다면 내려놓고 와야 한다.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와도 무난하다. 사내의 억센 숨결 같은 바람이 깊은 곳에 숨겨둔 먼지만 한 미련 한줌까지 남김없이 비워줄 수 있는 곳이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부는 바람은 보리밭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불고 머리칼 하나하나를 다 셀 것처럼 분다. 하여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 옷의 단추라도 떨어지지 않았나 싶어 살피게 된다.
나는 여며야 할 것보다 버려야할 것이 더 많은 사람이다. 밥벌이에 관한 생각들을 짊어지고 사느라 늘 등이 아프다. 어설픈 농군에서 잇속 챙기는 장사꾼도 되어야 하니 속에선 신물이 치민다. 녹슨 문장을 껴안고 밤마다 씨름을 하느라 머리는 지끈거린다. 하지만 내겐 숨통 같은 그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그런 중에 누구나 처음이라는 갱년기를 힘겹게 지나고 있다. 몸에선 불이 나는데 손발은 시리고 저리다. 이처럼 잡다한 삶의 찌꺼기들을 이 언덕에 부려놓고 바람이 거두어 가는 걸 지켜보러 왔다. 다 버려서 텅 비어버린 내 속에 맑은 풍경소리 하나 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구만리 허릿등에 서서 삼각대를 펼친다. 무거워 버리려던 물건이 끊임없이 누웠다 일어나는 바람을 붙잡자니 소용에 닿는다. 이 물건이 카메라를 흔들림 없이 지탱해주지 않는다면 바람은 정갈하게 표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신형의 가벼운 삼각대에 마음이 가던 참이었다. 참지 못하고 바꾸었더라면 이토록 바람 많은 언덕에서는 제 구실을 못할 뻔했다. 때론 투박하고 못생긴 것이 귀하게 여겨질 때도 있구나 싶다. 진득하지 못한 내 마음 먼저 버려야겠다.
바람이 귀를 때리더니 머리칼이 눈을 가린다. 잠시나마 보이지 않으니 소리는 더욱 선명하다. 버려야 할 것들을 다 버렸는지 묻는 소리 들린다. 바람은 어찌 알았을까. 내려놓은 것들이 못내 아까워 슬쩍 주워 담으려던 중이었다. 바람의 물음에 놀라 언뜻 깨닫는다. 이토록 세찬 바람의 언덕에서도 움켜쥐기만 한다면 난 영원히 놓지 못하겠다는 걸. 그러니 지금이 가벼워질 수 있는 적기라는 걸 말이다.
신은 성전에만 기거하는 건 아니다. 풀포기 하나에도 내리는 빗줄기에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내놓지 못하고 움켜쥐려는 나에게, 사는 일에 자꾸만 힘겨워 하는 나에게 말 걸어 준건 바람의 몸을 빌린 신이 아니었을까. 훌훌 털어버리고 홀가분해진 맘으로 세상 속에 다시 나아가라고 위로하는 소리 들리는 것 같다. 카메라 앵글 속에서 좀 더 가벼워진 내가 웃고 있다. 흔들리는 보리를 배경으로 더는 흔들리지 않을 내가 바람 속에 초연하다.
제가 지닌 등짐이 무겁다고 생각 키우거든 국토의 방향키를 쥐고 있다는 호미곶 언저리 구만리 언덕에 서 볼 일이다. 구만리 허릿등의 바람을 맞아 볼 일이다. 이 고장 사람들의 염려처럼 ‘내 밥 먹고 내 배 꺼져’도 아깝지 않을 만큼 이 언덕에서 부는 사람은 당신의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구만리 바람에 홀려서 길 잃지 않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거죽뿐이 아닌 온전한 내 마음을 데리고 집까지 갈 수 있을까. 구만리 언덕을 떠나려니 어느새 친근해진 바람이 허리춤에 달려들어 자꾸만 내 팔짱을 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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