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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튼 양파들 / 조말선

에세이향기 2022. 2. 21. 14:26

싹튼 양파들 / 조말선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통화중 신호음을

들었다 나는 한번 시도한 일은 멈출 줄 몰랐다 나는 한번 들어선 길은

돌아갈 줄 몰랐다 뚜, 뚜, 뚜, 뚜 듣지 못할 응답이 나에게로 돌아와 꽂

혔다 차창 밖으로 발개진 꽃잎들의 통화가 소란스러워졌다 세상는 모

두 통화중이었다 나는 나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안에 통화중 신

호음이 가득 차올랐다 귓바퀴가 수백 다발의 코일을 빨아들였다 나는

나의 고백을 듣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디 간 거야. 나는 나의 응답을

찾지 않았다 나는 고독해졌다 나는 팽창했다 귓속에서 입이 찢어졌다

백년은 늙은 내 입 속에서 푸르른 말들이 나를 겨냥했다

 

 

조말선: 1965년 경남 김해 출생

1998년 <부산일보> <현대시학>으로 데뷔

시집: <매우 가벼운 담론>

 

 

소통되지 않는 전화와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의 관념을 연계시키는 것은 익숙한 이미지에 속한다. "세상은 모두 통화중"이고 "나는 나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다. 전화는 '나'의 고립과 어두운 '나르시스즘'을 확인하는 매체이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자신의 시적 상상력을 한발짝 더 깊은 곳으로 진입시킨다. "나는 팽창했다 귓속에서 입이 찢어졌다" 라는 표현처럼, 이 기이한 나르시시즘 안에서 '나'의 '입'은 '내 귀속'에서 폭발한다. '말들'은 외부로 나아가지 못하고 내 육체의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맴돌다 폭발한다. 그런데 왜 이 시의 제목이 "싹튼 양파들"일까? 여러 겹의 껍질로 몸을 이루고 있는 것, 혹은 그 껍질을 뚫고 자기 몸 안에서 솟아 나온 '싹', 참을 수 없어 몸밖으로 터져나온 "푸르른 말들"? / 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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